이수학의 농간으로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된 채 백수 신세로 내몰렸던 시절의 필자 나이가 40세였다. 철석같이 믿었던 동향 친구이자 동업자로 부터의 배신은 여러 측면에서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선 왼쪽 눈에 이상이 왔다. 어느 날 왼쪽 눈 시력이 완전 제로가 되었다. 그저 새까만 흑색으로만 보였다. 게다가 종합병원 안과에 갈 의욕도 기운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필자의 사연이 당시 해사신문 CEO였던 유 주간이라는 사람에게 알려진 모양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집으로 전화가 왔다. 만나보았더니 자신이 운영하는 해사신문의 국장(출판국장 겸 논설위원)으로 와달라는 것이었다. 현재는 편집국장이 있어 우선 출판국장 및 논설위원으로 와서 주로 원고를 많이 작성해 달라는 주문이었다.
이에 필자는 두 가지 요구 조건을 내걸었다. 하나는 독자적 집무 공간(사무실)과 임원급 대우였다. 흔쾌히 승낙하기에 다음 주 부터 출근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해사신문에 출근해보니 임원실에 필자 책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당시 해사신문은 2명의 임원, 즉 유 주간과 전우성 이사가 재직하고 있었다.
전 이사는 서울대 정외과를 졸업한 뒤 일간지 기자를 거쳐 유 주간과 관세정보라는 매체에 한 때 근무한 경력이 있는 분으로 필자의 해사신문 근무 중 유일한 우군이자 후원자였다. 특히 필자의 글에 항상 호감을 표시했다. 특히 자신은 칼럼 하나를 작성하려면 긴 시간이 소요되는데 반해 필자는 쉽게 글을 쓴다며 아주 부러워하기도 했다.
해사신문 근무 초기 필자는 매주 2회 발간하는 신문에 사설, 칼럼(시론)에다 해운야화, 가십성 논평(동서남북 같은) 등 매주 8건에 달하는 각종 원고를 작성해야만 했다. 왼쪽 눈이 거의 실명상태에서 필자는 백지에 큰 글씨로 작성하면 필자의 아내가 이를 원고지에 옮겨 적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 필자 아내는 어린 시절 조부로부터 한문 공부를 한 바 있고 법률사무소에서 한자가 난무하는 서류들을 다룬 바 있어 한자에 대해 동년배의 여성들보다 월등히 높은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필자가 흘려 쓴 한자들도 쉽게 정자로 옮겨 쓰는 능력을 갖추어 작업에 진도는 빠를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해운항만청 진념 청장이 새로 부임했던 시기였다. 이에 필자가 시론을 통해 ‘신임 진념 청장에 거는 기대’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고, 진 청장이 과거 경제기획원 차관보 시절 해운에 대해 언급했던 사실을 거론하면서 경제 관료로서 해운업에 대한 이해가 아주 높다고 평가, 향후 해운정책에 대한 기대감을 표시하는 내용이었다.
이 칼럼이 나가자 진 청장이 필자 회사로 직접 전화를 걸어서 필자에게 감사와 고마움을 표시해 왔다. 이후 해운항만청 국장들은 해운계모임이나 파티에 나가면 해운 관료들이 스스로 필자를 찾아와 인사를 하곤 했다. 예를 들어 이종성 해운국장 등이 그 좋은 예이다.
그리고 이어 해사신문 편집국장에 취임했는데 이때 편집부장이 함관영 부장이었고 기자로 정웅묵 등 서너 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곧 심각한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정웅묵 기자가 광고를 해 오면 30% 정도의 리베이트를 회사로 부터 받고 있었다. 그리고 유 주간도 정 기자와 밀착, 유 주간이 자가용으로 함께 출근하는 것 아닌가.
이에 정 기자의 기고만장이 편집국 분위기를 아주 흩트려 놓았다. 다행히 함 부장이 정 기자를 철저히 통제, 필자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하지만 함 부장이 사직하자 정 기자의 일탈행위는 도를 넘어 갔다. 물론 정 기자가 이미 타계한 상태이니 더 이상 구체적인 사례는 거론하지 않겠다.
이에 필자는 해사신문 편집국장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여기에는 유 주간이 2년 여 동안 단 한 달도 급여를 지불하지 않는데 대한 항의 표시 역시 곁들였다. 무엇보다 엄청난 스트레스 때문에 혈압이 상승, 더 이상 버틸 수도 없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 놓인 필자에게 동향(대구) 선배이자 이수학의 고교(경북고) 선배이기도 한 서인곤 사장이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해 왔다. 이 당시 서 사장은 필자가 기획한 뒤 이수학이 등록에 실패한, 그래서 서인곤 사장이 나서 해결했던 월간 무역운송 발행인으로 종합운송매체 경영자이기도 했다. 이 잡지의 편집인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 때 기자로 근무하고 있던 인물들이 이인애 기자, 김기훈 기자, 임영미 기자 등 4~5명이었다.
월간지 편집장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국내 무역·운송 관련 교수들의 진면목을 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1989년부터 1991년 까지 3년 여 재직하던 중 어느 지방대학교의 김 교수라는 분이 사무실로 필자를 찾아왔다.
예전에도 월간지에 간혹 기고를 했다면서 원고를 가져왔다. 그리고 명함을 주고받았는데 대학 교수라는 직함에다 ‘국제운송물류 OO학회’의 총재라는 희한한 직책까지 곁들여 있는 명함이었다. 문제는 원고 내용이 완전 허접할 데 없는 함량미달의 수준이었다.
일본 어느 운송지 내용을 짜깁기한 것으로 한국의 Off-Dock CY 설정과는 전혀 상이한 ‘컨’터미널 On-Dock CY/CFS 자료를 인용한 한 마디로 엉터리 기고문이었다. 당연히 게재불가 방침을 정하고 싣지 않았다.
그랬더니 몇 개월 후 어떻게 알아냈는지 필자의 집으로 과일 바구니를 들고 느닷없이 찾아왔다. 그것도 주말 오후에 말이다. 김 교수를 대동하고 집 근처 다방으로 가서 대화를 나누었다. 자신의 원고가 게재되지 않은 이유를 묻기에 조목조목 잘못된 부분을 지적한 뒤 이 같은 오류의 수정이 이뤄지지 않는 한 게재는 불가능하다고 단정적으로 강하게 지적했다.
그리고 얼마 후 새로이 작성한 원고를 가져왔는데 한국적 컨테이너 터미널의 실상을 모른 채 서술하다보니 여전히 게재 불가한 수준이었다. 이로 인해 김 교수는 몇 차례 상경, 필자를 계속 괴롭히는 통에 나중에는 아예 상대를 하지 않았다. 이상한 점은 그렇게 대학 교수라는 사람을 홀대했음에도 끈질기게 찾아오는 데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이렇게 몇 개월이 흐른 후 김 교수에게 물어보았다. 왜 그렇게 박대를 당하면서도 기고문 게재가 절박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학회 수입의 대부분을 대기업의 후원금으로 충당하는데, 매체에 기고문 게재되는 것이 연구 실적으로 인정받기에 어쩔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학자라기보다 장사꾼의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대목이었다.
- 이종옥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