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 외길 해운기자 45년] 경영 분쟁 수습에 성공해

취재부
2018-12-25
해운 주간지 이택영 발행인 회장이 도자기 회사 부도가 필연적 수순으로 흐르자 해운 주간지 발행인을 자신의 6촌 동생인 이수학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편집인은 필자를 등록시켰다.
동시에 해운 주간지 대표이사 사장에 이수학을 임명한 뒤 주주 모두를 차명 인사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필자와 이수학에게 각각 10%의 주식을 공로주 명목으로 배분했다.


동급 임원이 상사 위치에

능력 측면이나 자질 면에서 이수학은 사장 감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택영 회장은 필자와 이수학이 오랫동안 한 회사에 함께 근무하면서 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음을 익히 파악, 이 점 역시 이수학을 대표이사 사장에 앉히는데 큰 몫을 차지한 것이다.
해운 주간지의 핵심 업무인 편집업무를 관장하고 있는 필자가 만약 이택영 회장에게 반기를 들거나 또는 이수학과 경영 갈등을 야기하면 회사는 그야말로 풍비박산의 위험에 놓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감안, 이택영 회장은 피신 전 필자와 이수학에게 화합할 것을 신신당부하고 떠났다.
이수학은 그야말로 신이 났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존재인 이택영 회장이 사라진 채 해운 주간지 경영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6개월 정도는 정상적 근무를 하더니 그 이후부터는 오전 근무만 하고 오후에는 차를 몰고 퇴근해 버렸다. 그리고 유흥업소 종사 여성들을 찾아다니며 풍류를 즐기곤 했다.
당연히 이 모든 비용은 경리 출신답게 회사 돈으로 감당했다. 예전에 이택영 회장에게 빼돌려주던 공금을 이제는 자기 자신을 위해 마음껏 사용하게 된 것이 그렇게 신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수학이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었다. 이택영 회장을 너무 쉽게 본 것이다. 비록 스스로 드러내지 못하는 신세이지만 이수학의 실체, 즉 품성을 잘 아는 이 회장은 누군지 모르지만 경리 분야에 자신의 심복을 심어 두고 정기적으로 보고를 받았다고 생각된다.
이수학의 장난질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2년 여 이수학의 기고만장한 호시절이 흐른 뒤 어느 날 예고 없이 이택영 회장이 회사에 모습을 나타냈다. 사장실 위에 회장실을 만든 후 그동안의 경영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시작했다. 특히 경리 부분에 집중, 이수학의 약점을 완전 파악, 당장 회사를 떠나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만만히 물러설 이수학이 아니었다. 자신을 축출하면 그동안 이택영 회장에게 빼돌려진 회사 공금 등 경리비리를 세무 당국에 신고, 회사 문을 닫게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면서 법적으로는 자신이 대표이사 사장인 만큼 모든 결재는 자신에게 올리라고 해운 주간지 임원 및 간부들에게 통고했다.
죽어나는 것은 일반 간부들이었다. 똑같은 결재 서류를 2부 만들어 두 사람 모두에게 결재를 받아야 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이에 어쩔 수 없이 필자가 중재자로 나섰다. 우선 이택영 회장의 “공사판에 떠도는 놈을 근무시켜 사장까지 시켜주었더니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이 무슨 짓이냐?”고 노발대발함을 진정시킨 후 현실적으로 이수학의 위협이 그냥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주지시켰다.
그리고 괘씸하지만 요구 조건을 들어준 뒤 곱게 내보내자고 설득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이수학에게 "그래도 6촌 형님인데 적당한 선에서 요구 조건을 관철시킨 후 회사를 떠나는 현명함을 보여 달라"고 당부했다. 
이렇게 이택영 회장과 이수학 사이에 여러 차례 의견 조정을 벌인 끝에 이수학의 요구, 즉 프로스펙스 신발가게 하나 할 수 있는 위로금(당시로서는 거금인 5천만 원 정도)을 받은 후 스스로 사직했다. 이렇게 회사의 경영 분쟁은 필자의 노력으로 수습되었지만 후임 대표이사 선임이 난제 중 난제였다.
어떤 능력자가 와도 흐트러진 회사 분위기와 또 편집 분야를 완전 장악한 필자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인물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이에 고심을 거듭하던 이택영 회장은 필자를 대표이사 사장에 선임하는 묘수를 찾아냈다.
무엇보다 그동안의 분쟁으로 흐트러진 임직원들 장악이 가능, 회사를 조기에 안정시킬 수 있음을 이택영 회장은 염두에 두고 필자를 사장으로 선임했다. 또한 중재자로서 회사의 위기를 또 한 번 수습한 공로도 감안, 상무이사에서 2단계 월반, 대표이사 사장(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선임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이 회사 공고를 통해 주간지 기사 면에 게재되자 해운 업계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우선 주요 해운회사 및 단체의 대형 화환이 쇄도, 회사 정문이나 사무실을 다 채우고도 남음이 있어 하는 수 없이 회장의 양해를 구한 뒤 일부 화환은 필자의 집으로 가져갔다. 화환은 주로 회사 차원에서 보냈다면 축하 전문은 그동안 필자와 인연을 맺었던 수많은 해운인들이 쉴 새 없이 보내오는 통에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취임식은 편집국 사무실에서 거행했는데, 이택영 회장은 새로이 사장실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동시에 타고 다니던 차량도 한 단계 높여 중형 세단으로 바꾸어 주는가 하면 운전기사도 새로이 젊은 친구로 교체해 주었다.
그런데 이수학은 협상 과정에서 필자에게 개인적인 요구사항을 하나 제시했다. 다름 아닌 자신이 해운 주간지 신규 등록을 하면 동업을 하자는 조건이었다.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절대 순순히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기 혼자서는 해운 주간지를 발간할 수 없으니 필자가 도와주어야 자신도 해운 주간지 경영자로서 이택영 회장과 정정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다는 복안이었다. 솔직히 이 당시 필자가 이수학 요구에 별다른 생각 없이 약속한 바는 신규 주간지 등록이 쉽지 않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태우 정부의 규제 완화로 언론 자율화가 크게 진전, 정기간행물 규제가 풀리면서 이수학은 손쉽게 등록, 필자에게 함께 해운 주간지 경영을 하자며 압박해 오고 말았다. 이에 관한 사항은 추후에 언급하기로 하고 해운 주간지 대표이사 사장이 된 후 곧바로 당면한 심각한 고민부터 술회해 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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