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 외길 해운기자 45년] 동급 임원이 사장에 취임

취재부
2018-11-20

▲상무이사 시절의 필자


요즈음 기업주 친인척들의 임직원을 향한 갑질이 사회적으로 큰 비난을 받고 있다. 경영 능력이나 인품 면에서 함량 미달의 사람이 단지 대주주 또는 기업주의 인척이라는 단 하나의 사실로 인해 온갖 특혜를 받아 승승장구하는 한편 조직원들에 대해 온갖 횡포를 다 부리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6촌 동생의 사장 취임

필자가 해운 주간지 공채 기자로 입사한지 1년여 시점에서 이택영 발행인의 6촌 동생 되는 이수학이 경리 및 총무 담당자로 입사했다. 대구의 명문고 경북고를 졸업한 후 경부고속도로 공사장을 전전하다 해운 주간지에 들어온 것이다.
이후 필자가 차장, 부장, 이사로 승진했을 때 이수학 역시 동일하게 진급, 함께 해운 주간지 임원으로 성장했다. 필자가 오로지 업무 능력을 발판삼아 임원이 되었다면 이수학은 이택영 사장의 인척이라는 단 하나의 사실로 인해 임원이 되었다. 
이택영 회장은 70년대 중반부터 장인이 운영하던 천안 소재 영흥도자기의 해외 수출업무를 관장하다 회사 자체를 인수, 제조업 경영까지 겸하게 되었다.
해운 주간지는 70년대까지 한국 유일의 해운 주간지인데다 경영이 단순했지만 도자기 제조 수출업은 그러하지 않았다. 계속 적자가 누적되자 이택영 회장은 해운 주간지 이수학 이사를 영흥도자기 상무이사로 전보∙발령했다.
그리고 얼마 후 필자도 상무이사로 승진했다. 그런데 영흥도자기의 천안 본사로 내려간 이수학 상무는 업무의 폭증과 이택영 회장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사직서를 던져놓고 서울로 올라와 버렸다. 이택영 회장은 대노했지만 별 수가 없었다.
서울로 올라온 이수학은 곧 필자를 찾아왔다. 새로운 해운 전문지를 발간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80년대 초 전두환 정권에서는 신규 전문지 발간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다. 
법적으로는 가능한 일이었으나 문공부 장관의 결재가 있어야 가능했기에 문공부 장관을 움직일 수 있는 정권 실세가 아니고서는 신규 월간지 하나 등록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수학으로서는 한 군데 믿는 구석이 있었다. 80년대 초 청와대 홍보수석 겸 대변인이었던 황선필씨와의 인연이었다. 이수학의 부친은 정치인으로 4.19혁명 이후 초대 민선 대구시장에 당선된 바 있었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이수학의 가정교사가 바로 황선필 씨였고 자연스럽게 집안끼리도 잘 아는 처지였다.
그래서 이수학은 케이크 하나를 구입한 후 황선필 수석 집으로 찾아가 황 수석 모친에게 인사하고 해운 전문지 신규 등록을 도와달라는 청을 넣고 황 수석에게 말 좀 잘 해달라고 간청했다. 황 수석의 모친은 선선히 응낙했다. 하지만 1달, 2달 세월이 가는 동안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이 때 필자가 작성한 신규 등록에 관한 제반 계획서는 이미 문공부에 제출된 상태였다. 이수학으로서는 이런 서류를 작성할 능력이 없어 모든 사항을 필자에게 일임, 완성했다. 그리고 필자 역시 공식적으로 나설 수 없는 처지여서 문공부 출신 퇴직 공무원을 소개받아 이 업무를 감당케 했다.
이런 사이 해운 주간지 발행인 이택영 회장에게 중대 변화가 몰려왔다. 영흥도자기 본사 공장에 화재가 발생,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수익성 악화로 고전하고 있던 영흥도자기로서는 결정타를 맞게 된 것이다. 부도가 멀지 않음을 감지한 이택영 회장은 자신의 재산을 모두 차명으로 돌려놓았다.
해운 주간지 주식 역시 마찬가지 방법으로 주위 믿을 만한 친지들 앞으로 돌려놓으면서 필자와 이수학에게도 각각 10%의 주식을 배분했다. 그리고 부도 임박 전 필자와 이수학을 양평 어느 한적한 고급 식당으로 데려가 자신은 영흥도자기 부도에 따른 법적인 책임이 경감될 때 까지 피신해 있겠노라고 밝혔다.
그리고 영흥도자기에서 일방적으로 사표를 내고 나간 이수학을 6촌 동생이라는 혈연관계임을 감안, 자신 대신 해운 주간지 발행인 겸 대표이사 사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필자는 상무이사 그대로이고 단지 편집인 지위만 부여하는 형태로 결정한 후 자취를 감추었다.
필자와 이수학은 십 수 년 동안 동급이었으나 하루아침에 사장이라는 지위로 필자의 상사가 된 셈이었다. 하지만 편집의 편 자도 모르는 이수학으로서는 경리, 총무 업무 외에는 모두 필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업무 조정은 이택영 회장이 이미 이수학에게도 통고한 바 있었다. 자신도 편집 업무에 관한한 필자에게 위임한 만큼 이수학도 따르라는 지시였다.
이런 복잡한 사태가 진행되는 동안 이수학이 문공부에 신규 등록을 신청한 월간지 문제는 여전히 진전이 없었다. 황선필 수석이 몸을 사려 전혀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이수학은 절친한 선배였던 서인곤 사장에게 술 한 잔 하며 하소연했다.
서인곤 사장은 대구 출신으로 이수학의 경북고 선배(3~5년)였다. 테니스를 아주 잘 쳐서 주말의 테니스 사내 시합에서 심판을 봐주는 등 잘 아는 사이였다.
필자의 동향 선배이기도 해서 필자 역시 서인곤 사장을 선배님이라고 불렀다. 이 같은 인연의 서인곤 사장이 이수학의 하소연에 자신이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 당시 서인곤 사장의 경북고 동기동창인 박철언씨가 청와대 비서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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