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 외길 해운기자 45년] 해운계 최초 해사연감∙인명록 발간

취재부
2018-10-24

정 국장이 사임하고 필자가 편집부장 겸 편집국장으로 임무를 수행한 시기는 1981년 1월부터였다. 차장 1년 만에 부장으로 승진했는데 이 해 정초 이택영 회장 자택에서 간부들 회식 겸 신년 구상 모임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필자는 간행물 발간 확대 및 신설을 제시했다.



연감 발간 대성공

필자가 연감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진 배경은 친형인 이종무 전 삼성그룹 이사 때문이었다. 이종무 이사는 60년대 합동통신에서 연감 편집 업무를 시작으로 언론계 생활을 시작한 바 있어 필자는 일찍부터 연감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종무 이사는 합동통신을 사직하고 중앙일보에 입사, 소년중앙을 창간하고 여성중앙 주간, 조사부장 등을 역임한 뒤 정신문화연구원 실장으로 정년퇴직했다. 이후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의 '호암자전' 대필자로 13번 만에 이병철 회장의 낙점을 받아 그룹 이사로서 수 년 동안 이 일에 전념한 바 있다.
이처럼 친형인 이종무 이사로 부터 연감에 대해 듣고 익힌 바 있어 1981년 한 해 동안 한국 해운계 최초로 해사연감 발간 작업에 돌입했다. 세계 경제∙무역 및 물동량 동향을 집필하기 위해 정부 간행물 센터에서 관련 자료집 등을 구입, 집필에 착수했다.
또 선박운항업, 대리점업, 해상운송주선업, 항계내업, 예선업, 용선업 등 해운업체들 현황은 물론이고 조선업, 조선기자재업 현황까지 망라, 그야말로 해사산업 전 분야의 업체 현황과 이들 업종의 한국적 상황까지 집필했다.
물론 업체 현황의 기본 자료는 공문을 통해 각 업체들로 부터 설문 응답 형태로 수집했다. 이 일은 편집국 소속 기자들에게 배분, 작업을 이끌어 나갔다. 여기에다 한국 해사 전 업체 및 관련 단체의 부장급 이상 해운∙해사인 들의 이력서를 모아 해사 인명록을 맨 마지막 부분 부록 형태로 발간키로 확정했다.
해사연감과 인명록은 그 때까지 해운계의 어떤 매체나 단체에서도 시도해 보지 않은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해운계 최초라는 위험부담이 있었지만, 상당 수준으로 성장한 국내 해운업과 조선업의 규모로 미루어 필자는 성공을 확신, 이 작업에 매진했다.
출발부터 대성공이었다. 발간 전 광고를 추진한 결과, 주요 해운사는 물론이고 조선업체와 조선기자재 업체까지 광고를 의뢰하여 총 5천만 원 이상의 광고 수입을 해사연감 발간 전 확정할 수 있었다. 제작비는 인건비까지 포함, 2천만 원 이내로 발간 전 3천만 원의 흑자를 시현한 것이다.
제작비를 줄인 요인은 500페이지 이상인 점을 감안하여 활판인쇄로 지면을 편집한 뒤 깨끗하게 인쇄된 각 페이지를 촬영, 최종적으로 오프셋 인쇄로 마무리, 책의 품위는 높인 반면 인쇄비 중 가장 비중이 클 수 있는 식자비를 절약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판매가를 권당 5만원으로 책정, 발간 전 해운 주간지에 수개월 동안 지속적으로 홍보하여 책이 나오기도 전에 예약 구매 부수만 300여부에 달해 여기서도 1천 5백만 원 정도 수익을 연감 발간 전에 이미 4천 5백만 원의 이익을 창출했다.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필자는 해사 연감이 발간되자 기자는 물론이고 영업부서 등 전 임직원에게 5만원의 책 한 권을 판매해오면 권 당 만원씩의 인센티브 제도를 발효, 구독을 독려했다. 이 결과 거의 천 부 가까이 해사 연감을 판매, 여기서도 4천만 원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해사연감 발간으로 총 8천 5백만 원의 수익을 창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이택영 회장은 그야말로 대만족, 판매가 최종 마무리된 82년 여름, 필자를 회장실로 호출한 뒤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두툼한 봉투를 내밀었다. 짐작컨대 3-4백만 원 정도는 될 법한 부피였다. 그 때만 해도 필자는 참으로 순진해서 이택영 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봉급 받는데 왜 이런 것을 주십니까?"라고 말하면서 봉투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는 수고한 편집국 기자 및 직원들과 거하게 회식이나 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당시 편집국 전 직원은 20여 명에 이르는 대식구였다. 기자가 몇 순수 편집기자(레이아웃)까지 합쳐 6-7명에 자료(스케줄) 수집 여직원 4-5명, 여기에 식자공 7-8명까지 편집국 소속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해운 주간지 인쇄비 중 식자부문의 비용이 가장 많았다. 게다가 오프셋 인쇄물 주간지를 발간함에 있어 기사 및 스케줄 편집에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자체 제작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회사 경영에 절대적 공헌을 했음에도 이택영 회장은 자신이 천안의 도자기 제조∙수출업체 경영에 전념하기 위해 해운 주간지 대표이사 전무로 자신의 연세대 동기동창을 영입했다.
바로 이창기 전무로 중앙일보 동남아 특파원을 끝으로 중앙일보를 퇴직한 언론인이었다. 문제는 이 전무가 언론인으로서 기사를 다루어 봤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해운 전문성이 제로인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고 해운 주간지 편집에 관여하고자 이것저것 간섭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최고 경영자 신분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참았다. 그러나 어느 날 마침내 필자가 폭발하고 말았다. 이 전무가 필자를 포함하여 전 편집국 직원을 모아놓고 회의랍시고 ‘기사 작성이 어떻고...’라며 훈시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필자는 “편집국 전 직원 일어서”라고 말한 뒤 “퇴장”을 명했다. 그리고 이 전무를 향해 “임원 회의를 열어 논의를 하든지 하시지 편집국장인 임원과 평직원을 한 자리에 부르고 이 무슨 난센스입니까?”라고 소리 지른 후 회의실을 나와 버렸다.
그리고 편집국 전 직원을 따로 모아놓고 선언했다. “앞으로 내 허락 없이 이 전무에게 보고 또는 접촉하는 사람은 곧바로 잘라버린다.”라고 행동 처신을 신중히 하라고 못 박았다. 발행인으로 부터 이 전무 영입 시점에 편집권에 관한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는 확약을 받은 바 있기 때문이다.


- 이종옥 발행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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