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혁 에버렛기선 한국 총지배인(사장)에 사전에 전달한 질문 요지는 주로 회사 경영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개인적인 사항이 몇 개 들어 있었다. 외국 선주 한국대리점 선사, 그것도 외국계 법인의 CEO인 이동혁 사장은 첫 질문 답변부터 온통 해운 용어 일색이었다.
특히 운임 동맹과 관련된 NB, JKTPFC, MLB, 여기에다 유럽 항로 ScanDutch 경영과 관련 컨소시엄, 크로즈드 컨퍼런스 등 해운 용어가 난무하다보니 정 국장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자 동석한 필자에게 답변 메모를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인터뷰를 마치고 귀사한 정 국장은 질문 요지에 대한 답변 초안 작성을 필자에게 부탁했다.
이후 사전에 미리 예정된 해운 기업 CEO 인터뷰에서는 정 국장은 그저 얼굴 마담 노릇만 하고 추가 질문은 모두 필자의 몫이었다. 해운 용어가 포함한 답변을 정 국장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렇게 예정된 인터뷰가 끝나자 더 이상 해운 회사 CEO와의 접촉은 사라졌다.
이 같은 일련의 상황이 지나자 정 국장은 모든 편집 업무에 필자의 의견을 구하고 결정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활로를 순수 편집(레이아웃 업무)에 치중했다. 그것도 바뀐 행간이 "다."로 끝나면 보기 싫다며 단어 추가를 요구하는 식으로 지극히 미세적이고 쪼잔한 지시 일색이었다.
그리고는 해운 주간지 지면에 해운 경영 이론도 아닌 일반 기업 경영 이론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해운 업계의 싸늘한 반응이 올라왔다.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해운 주간지 지면에 "이 무슨 낭비냐?"는 비아냥거림이 쇄도했다. 어떻게 발행인 귀에 까지 들어갔는지 정 국장의 연재는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자신의 입지가 여의치 않음을 눈치 챈 정 국장이 새로이 시도한 비책은 자신의 심복을 기자로 심는 일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부인이 이화여대 출신임을 내세워 이대 취업 관계자에게 기자 추천을 의뢰하는 데서 출발했다. 그리고는 일단 1차 면접은 필자가 담당토록 조치했다.
그래서 7-8명의 지원자 중 3-4명을 선발, 이들 이력서를 국장에게 넘겼더니 곧바로 전체 이력서를 달라고 하더니 필자가 판단하기에 제일 능력이 떨어진 정 모 지원자들부터 면접한 뒤 최종 합격자로 선정했다. 사전에 자신이 심어두려는 인물이었다. 어쩔 수 없이 채용은 했으나 취재, 외신 어느 쪽에도 쓸 데가 없어 고졸 여직원 스케줄 관리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 사건 이후 필자의 정 국장에 대한 존중심은 사라졌다. 그저 상사의 최소한의 예우는 갖추는 선에서 대우했다. 어떤 루트인지는 모르겠으나 편집국에 동향 파악에 능통한 발행인은 곧 정 국장의 무능을 파악, 서서히 정 국장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 첫 단계로 편집차장에 승진한지 1년 밖에 되지 않은 필자를 편집부장으로 또 다시 승진 발령했다. 그리고는 발행인은 수시로 필자의 책상으로 찾아와 친한 척 하면서 바둑을 두자는 등 말을 걸기 일쑤였다. 필자 역시 장 기자가 정 국장의 심겨진 인물임을 감안, 장 기자 앞에서는 절대 정 국장에 대해 조금의 부정적인 언어도 사용하지 않았다.
임직원들의 생산성에 누구보다 민감한 발행인도 비록 자신의 고교 동기 동창이지만 정 국장이 급여만큼 일을 하지 못한다는 점을 그냥 넘어갈리 만무했다.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모르겠으나 정 국장은 곧 사직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편집부장인 필자가 편집국장 업무를 대행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1981년이었는데 그 해 가을, KBS 이형모 라디오 PD로 부터 필자에게 연락이 왔다. 1980년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이 동아방송을 KBS에 병합, KBS 제 2 라디오(792khz)가 발족했는데, 여기 소속된 PD가 이형모 씨 였다.
KBS로 찾아가 이 PD를 만났는데, 또 다른 후배 PD와 함께 필자를 KBS 식당으로 안내, 차 한 잔 하면서 자신들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녁 7시대에 "저녁의 792"라는 프로를 새로이 신설할 예정인데, 운송 분야를 중점 취급하는 형태로 이 코너의 시작은 해운계 소식으로 제작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필자와 KBS PD 두 사람이 장시간 의논한 결과, 방송 내용을 확정했다. 우선 필자가 해운계 소식을 5-6분 정도 전하고 나머지 3-4분 정도는 여기자 한 명이 부산항과 인천항에서 출항하는 주요 외항선 출항일자를 방송하는 형태로 결정했다. 두 내용의 원고는 필자가 다 작성키로 하고 여기자 한 명은 이화여대 출신의 김 기자가 담당키로 추후 PD와 협의, 결정했다.
문제는 매일 방송해야하고 또 일요일 방송분은 토요일에 토요분과 함께 사전에 녹음키로 했다. 매일 KBS에 가는 것은 시간이 너무 소요되고 필자 고유 업무에도 지장이 초래됨을 감안, 필자 회사 지하실에 위치한 자료실에 KBS 측이 방송 녹음용 전화 마이크를 설치해 주었다. 이를 통해 매일 오후 녹음을 한 후 방송이 나가게 되었다.
1981년 10월 1일 방송이 개시되자 해운계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저녁 7시 퇴근 시간 시내버스 차 안에서 들었다는 지적이 가장 많았다. 특히 상당수의 해운계 원로들은 해운 인식 제고의 큰 효과를 기대하면서 해운업에 대한 뉴스가 매일 공중파 방송을 탄다는데 큰 의미를 부여했다.
필자 개인으로서도 여러 측면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밀려왔다. KBS TV를 비롯해서 KBS 제 1 라디오에서도 해운에 관한 전문가 언급이 필요한 사항이 생기면 곧바로 필자에게 연락을 해 왔다. 이에 따라 KBS TV 아침뉴스는 물론이고 저녁 9시 메인뉴스에서도 필자의 얼굴이 자주 비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매일 방송분에 문제가 생겼다. 여기자(김 모 기자)가 담당한 입출항 소식에 수정이 요구된 것이다. 김 기자의 목소리에 비음이 있어 방송국 심의에서 자주 지적된다며 여기자 교체를 KBS 측이 요구해 왔다. 이에 필자는 고심 끝에 송영선 기자로 교체했는데, 다행히도 비음이 없는 청아한 목소리라고 칭찬을 듣게 되어 한 시름 놓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