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동 필자의 집에서 경복궁 맞은 편 통의동까지 토요일 오후라서 그런지 30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내 회사에 도착, 곧장 사장실로 향했다.
당시 이택영 사장은 초조한 마음에서 줄담배를 피웠는지 사장실에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급한 성격의 사장은 필자가 채 착석하기도 전에 "어떻게 발간이 계속될 수 있는 방도가 있습니까?"라고 질문부터 던졌다.
필자가 좀 더 노련하고 계산적이었다면 명쾌하게 대답하지 않고 사장과 밀당을 계속 충분히 그동안 불만스러웠던 사항을 관철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저 “전사적으로 저를 지원해 주시면 가능합니다.”라고 답했다.
순간 얼굴이 환해진 이 사장, “무엇을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는가?”라고 물어왔다. 그래서 회사로 오면서 생각해 두었던 복안을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전 직원 총 동원령
우선 월요일 출근 즉시 두 군데 일간지에 경력 및 신입기자 모집 공고를 내되 이력서 란에 연락처(전화번호) 명기를 빠뜨리지 말아야 함을 강조했다. 최대한 빨리 기자를 근무시키기 위해서였다. 이 일은 총무팀장이 책임지고 수행하도록 강조했다.
그리고 월요일 직원들 중 스케줄 수집 및 작성이 가능한 사원들을 선발, 사전에 전화함으로써 오전 중에 모든 정기선사 스케줄 수집이 가능하도록 해야 함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 작성이 가능한 직원들을 최대한 많이 선발, 업무의 속도를 내도록 유도키로 했다.
또 월요일 오후에는 이들을 한 자리에 집합시켜 1~2시간 입출항 스케줄 작성 교육을 시킨 뒤 야근을 하더라도 월요일 중으로 작성 업무 완료를 목표로 정했다.
그리고 작성된 스케줄 검토 및 기사 작성을 필자가 맡되 늦게까지 야근한 뒤 통행금지 시간 전 회사 인근 여관으로 옮겨 작업을 계속하기로 하고, 이에 따른 제반 지원을 차질 없이 준비해 줄 것을 역시 총무팀장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필자가 그동안 구상해 두었거나 자료를 모아 두었던 기획취재 4~5건은 토요일 저녁 및 일요일 하루 종일 작성 원고를 마무리 하겠다고 말했다. 족히 주간지 지면으로 20페이지 이상 해당되는 작업이었다.
이어 외신은 화요일과 수요일 양일간 해운업계에서 영어번역을 가장 잘하는 극동선박의 구차장과 일어 번역은 조선일보 기자 출신인 해상운송주선업협회 한동환 전무에게 신세지기로 했다. 번역을 맡기는 형태는 너무 시간이 많이 소요되므로 번역물을 보면서 그 자리에서 번역해 주면 필자가 메모한 후 이를 바탕으로 해설까지 곁들인 형태로 내용을 보완함과 동시에 페이지 숫자를 대폭 늘리겠다는 복안을 밝혔다.
이렇게 목요일까지 모든 기사를 완료해서 필자는 목요일까지는 귀가하지 못하고 여관에서 늦도록 작업하겠다는 각오를 표명했다. 그리고 목요일까지 경력 기자를 반드시 서너 명 채용, 금요일 교정 업무의 차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비하겠음을 부언 설명했다.
이 같은 체계적이고 상세한 복안을 말하자 이택영 사장은 대만족, 필자에게 악수를 두 서너 번 청하고 기뻐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덧 시간이 저녁때가 되자 회사 근처 중국집에서 거하게 식사를 한 후, 필자를 자신의 자가용으로 귀가하게 했다. 그러면서 월요일에 다시 보자며 얼굴에 웃음이 가시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건강 해치며 강행군 지속
이렇게 3주 정도를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주간지 발간 업무를 수행하는 한편, 경력 기자 및 신입기자를 선발, 편집국 조직을 안정화시켜 나갔다. 일과 시간 중 회사에서 내근할 때 사장이 수시로 필자 자리로 찾아와 "무엇 도와줄 것 없느냐?"고 귀찮을 정도로 자주 얼굴을 내밀기도 했다.
결국 한 달 이상의 비상사태는 원만하게 해결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필자는 건강을 해치는 결정적 무리수를 두고 말았다. 지속적인 야근과 여관에서의 철야 등으로 신장(콩팥)에 무리가 가해진 것이다.
소득이 전혀 없었던 바는 아니었다. 발행인의 절대적 신임을 얻어 이후 매번 승진을 거듭, 34세에 편집이사, 38세에 대표이사 사장의 위치에 까지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곽 편집국장의 쿠데타가 진압되자 발행인은 자신의 고교 동기 동창을 새로운 편집국장으로 영입해 왔다. 경영관련 월간지 편집국장을 지낸 정병모 국장이 그 주인공이었다. 정 국장은 발행인의 용산고 동기동창으로 경희대를 졸업한 후 주로 월간지에서 근무한 바 있었다. 해운에 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었다.
부임 전 발행인으로 부터 충분한 설명을 들어 제반 사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더불어 편집국 내에서 필자의 존재 가치는 물론이고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도 잘 파악한 상태였다.
그래서 부임하자마자 필자에게 주요 해운회사 CEO와의 인터뷰 약속을 잡아달라고 요구했다. 자신도 해운회사 최고 경영자와 인간관계를 수립, 해운 주간지 편집국장으로서 위치를 공고히 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래서 70년대 말 당시 국내 최대 대리점선사이자 정기선 서비스 네트워크 측면에서 국내 톱 해운회사였던 에버렛기선의 이동혁 총 지배인(사장)과 인터뷰 약속부터 확정했다.
그러자 정 국장은 필자가 인터뷰에 동행할 것을 주문했다. 사전에 질문 요지는 이동혁 사장에게 보내주었는데 이 작업도 필자가 담당했다. 그리고 약속된 날짜에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 이종옥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