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 외길 해운기자 45년] 편집국장 반란의 전말(1)

취재부
2018-07-24
정확히 5년 3개월 동안 필자는 평기자로 지났다. 엄청난 양의 취재 기사와 연재물을 소화해 냈고 해운 전문성에 관해서도 사내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수준급이었다. 하지만 고분고분하지 않은 성격으로 발행인이든 편집국장이든 부당한 지시에는 전혀 순응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발행인의 일요일 낚시 같이 가자는 요구에는 단 한 차례도 응한 바 없었다. 곽 편집국장은 필자의 성향을 감안, 누가 봐도 부당한 지시라고 생각되는 요구는 하지 않았다. 
다만 필자 결혼식에 축의금을 내지 않는다거나 점심을 같이 하는 등의 인간적 교류는 배제시켰다. 그리고는 취재팀장인 필자 모르게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여기자와 단 둘이 식사하는 등 편집국 조직 관리를 엉망으로 이끌어 나갔다.


편집국장의 의도 효과 없게 만들어

하지만 구조적으로 곽 편집국장의 자기 사람 챙기기식 조직 관리에는 허점이 많았다. 우선 당시 편집국 기자들은 취재기자이건 외신기자이건 간에 기사 작성 외에도 선박 입출항 스케줄 체크 및 작성, 그리고 해운 용어 이해, 스케줄 및 기사 교정에 있어 필자의 도움 없이는 업무 수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교정 업무는 대부분 기자들이 감당하고 있지만 스케줄 수집 및 작성이나 해운 용어 이해는 해운 전문지 기자, 그것도 스케줄 전문지 기자의 특징이다. 그 중에서도 스케줄 수집∙작성을 기자에게 감당시킴은 발행인이나 편집국장의 잘못된 판단이라 할 수 있다.
대졸 출신 기자에게 자료 작성 및 수집을 맡길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편집차장이 되면서 이 문제를 고교 출신 여직원 채용으로 일거에 해결한 바 있었다. 좌우간 79년 당시에는 기자들도 스케줄 업무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 정기선 해운회사는 각 라인별로 스케줄 담당자가 따로 있었다. 예를 들어 에버렛기선의 경우 EOL, APL, ScanDutch 스케줄 담당자가 달랐다. 전체적으로 볼 때 80%는 고참 고졸 여직원이 담당자였다. 하지만 정기선 라인에 따라 대졸 남자 직원이 스케줄 담당자인 케이스도 20% 정도 달했다.
그리고 이들 남직원 중 다수는 해운 전문지 여기자들을 쉽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당시 사회 전체 분위기가 여성을 존중해 주는 문화가 아니었다. 해운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30세가 넘은 서울대 출신 엘리트 여기자가 스케줄 업무 때문에 해운회사 남자 직원으로 부터 "아줌마" 소리를 듣는 일도 있었다. 당시 해운회사 여직원들은 사장 비서 등 특수한 한두 명을 제외하고 모두 고졸이었다. 이에 해운 주간지 여기자도 고졸 직원으로 간주, 함부로 대하는 해운회사 남직원들이 더러 있었다.
이런 무례한 친구가 나타나 여기자가 필자에게 하소연 하면 곧장 조치를 취해주었다. 해당 남직원의 부서장이나 담당 임원, 심지어는 사장에게 까지 항의, 버르장머리를 고쳤다.
당연히 발행인이나 편집국장의 낙하산으로 입사한 외신담당 여기자들은 필자의 도움이 절실했다. 여기에다 취재는 말할 것 없고 번역의 경우 해운 용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번역이 불가능, 필자의 도움이 또한 절대적이었다.
또 하나 금요일이면 일과시간 전부터 밤늦게까지 천풍인쇄소에서 교정을 보아야 했다. 당시는 기사면의 경우, 모두 활판인쇄여서 교정이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시간도 많이 소요되어 점심과 저녁 식사비가 회사에서 나왔을 정도였다.
게다가 금요일에는 편집국장이 천풍인쇄소에 들르지 않아 취재팀장인 필자 주관 하에 모든 업무가 진행되었다. 한 사람이라도 자리를 비우거나 교정 업무를 태만히 하면 다른 모든 기자들에게 피해가 오기 때문에 팀워크가 아주 중요했다.
이렇게 수개월 보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모든 기자들은 필자의 휘하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게 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입사는 발행인이나 편집국장 낙하산으로 들어왔어도 시간이 지나면 필자의 지시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특성을 지님이 그 때 해운 주간지 편집국이었다.
물론 필자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편집국장과 단 둘이 식사를 하는 등 개인적인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던 번역 담당 여기자들은 더러 출현했다. 하지만 필자는 개의치 않고 조직 장악력만은 확실하게 유지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오전 근무를 끝내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사주(사장)의 6촌 동생이자 총무 및 경리팀장인 이수학 과장이 사장 자가용을 타고 집으로 찾아왔다. 급하게 회사로 나와 달라는 사장의 전언을 전해주었다.
회사로 가는 차 안에서 내용을 들어본 즉 곽 편집국장이 외신기자 2명과 함께 사직서를 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 갑자기 외신 기자 2명이 필자에게 동시에 사직서를 제출한 바 있어 신입 기자를 구하던 차였다. 
결국 필자 외에 갓 입사한 취재 담당 여기자 한 명만 남겨두고 편집국장이 일종의 반란을 일으킨 셈이었다. 무언가 부자연스럽고 이상하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설마 편집국장 직위에 있던 임원이 이런 일을 전개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한 마디로 해운 주간지 발간을 중단케 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물론 사전에 발행인에게 무언가 요구 조건을 내걸었을 것이다. 그리고 발행인 사장이 이를 거절하자 행동에 옮긴 결과였다. 
그리고 필자는 어차피 자신의 의도에 찬성할리도 없고 자칫 은밀한 쿠데타 계획까지 노출될 수 있다고 판단한 편집국장이 필자를 철저히 소외시킨 일이기도 했다. 이것이 편집국장의 가장 큰 판단미스였다.
만약 필자에게 사전에 상의했다면 어떤 형태로든 편집국장의 요구를 들어주도록 도왔을 것이다. 동시에 편집국 기자들 대우 문제를 함께 개선시키는 쪽으로 필자가 움직였을 것이다. 필자 역시 발행인의 직원들에 대한 낮은 급여나 대우에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 이종옥 발행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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