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 외길 해운기자 45년] 어려움 속에서 기자들 장악 성공

취재부
2018-06-26

▲취재팀장 시절의 필자


지금은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70년대 초반만 해도 ROTC 장교는 매년 3,500~3,600명 가량이 임관되었는데, 성적순으로 군번이 부여되었다. 객관적으로 입증이 가능한 여름 병영훈련의 사격점수와 임관 고사 등에 의해 매겨졌다.
따라서 ROTC 장교는 군번을 보면 훈련 성적이 그대로 증명된 셈이다. 그리고 군번 앞에는 임관 년도가 표시된다. 필자는 71년도에 임관되었기에 군번이 71-00642번이었다. 전국에서 3,500명 중 642등으로 상위 20% 이내에 속했다.


ROTC 장교 선호 붐

그리고 필자가 전역할 시 대기업을 중심으로 ROTC 장교 전역자만이 응시할 수 있는 신입사원 채용 공고가 봇물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필자가 당시로서는 이름도 생소하고 갓 창간된 해운 주간지 공채 신입기자가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소규모 중소기업의 경우, 능력만 입증되면 쉽게 퇴사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즉 상사나 선배에 굽신굽신 거리지 않아도 조직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측면을 감안, 그 중에서도 선배가 없는 신생 해운주간지 기자를 선택했다.
그리고 언젠가 이 칼럼을 통해 언급했듯이 필자는 5년 여 동안 평기자로 지냈다. 발행인이나 편집국장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취재 지시도 단 한 번도 해내지 못하는 일이 없었던 관계로 조직의 필요에 의해 계속 근무시킨 것이다.
그리고 지난 달 지적했듯이 후배 기자들이 계속 사직, 5년이 지나자 필자 외에 해운 전문성을 지닌 기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5년 만에 취재팀장(과장급)이 된 것이다. 그리고 편집국장에 과시라도 하듯, 후배 기자들에게 수시로 점심식사를 같이 하자면서 식비는 반드시 필자가 부담했다. 
게다가 발행인이 편집국장과 필자 사이가 원만치 않음을 이용, 노골적으로 필자에게 호감을 표시, 편집국장의 견제 수단으로 활용했다. 이런 묘한 편집국 분위기를 의식, 편집국장 C고문은 어느 순간 가능하면 자기 사람을 기자로 채우기 시작했다. 특히 외신기자들이 그러했다.
C국장은 본인이 영어와 일어에 능통함을 무기삼아 해운 주간지 지면의 3분의 2를 외신으로 채웠다. 우선 일본에서 발간되는 일간 해사신문(일어)과 Shipping & Trade News(S&T News, 영어), 그리고 주간 Shipping Gazette(일어)와 월간 해운(일어) 등을 정기구독했다. 
이어 영국에서 발간되는 주간 Pairplay(영어)와 Lloyd List(영어), 월간 Containerization(영어) 등도 정기적으로 받아보았다. 그리고 이를 매체에 게재된 기사 중 한국 해운계가 참고할 만한 기사는 모두 번역, 게재했다.
당연히 외신기자 숫자가 아주 많았다. 영어 번역이 2-3명, 일어 번역이 2-3명으로 많을 때는 외신기자만 5-6명에 달했다. 
그리고 취재기자는 필자의 1명 정도만, 그것도 입출항 스케줄 수집 및 작성에 큰 비중을 둔 기자를 채용했다. 물론 이 모든 사항은 발행인의 결재를 받았다. 
자신의 호·불호에 따라 외신 기자를 선발했는데 다분히 개인적 친분이 있는 여기자들만 뽑았다. 하지만 번역 초기 단계에서 취재팀장인 필자의 감수를 받아야 했다. 해운 용어를 제대로 이해, 번역해야했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여기자들이 애초, C국장이 선발한 기자임에도 필자에 호감을 표시, 필자를 첨으로 깍듯하게 대하고 상사로서 존중해 주었다. 여기에는 여기자들, 특히 후배 여기자들을 대하는 필자의 자세와 C국장의 태도가 비교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필자는 여기자들에게 한 번도 진한 농담이나 이상한 성적 표현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C국장은 자신이 총애하는 여기자들을 따로 불러내어 다른 기자들 모르게 식사를 같이 하는 광경이 자주 목도되었다.
그렇다고 필자의 직속 부하인 취재 기자의 경우도 남자 기자이든 여자 기자이든 가리지 않고 취재나 기사 작성 면에서 엄격하되 해운계 인사들이 함부로 대하는 등 잘못된 사연이 노정되면 만사를 제치고 바로 잡아주었다.
간혹 해운 회사의 직원들 중 여기자를 우습게 보는 인물이 70-80년대에는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이때 필자는 해당 해운인 직속 상사 또는 임원이나 CEO에게 강력 항의, 두 번 다시 그 같은 무례를 범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대비했다.
더불어 취재·외신 기자 가릴 것 없이 해운 주간지내 다른 부서의 직원들이 기자들을 함부로 취급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했다. 우선 기자들에게는 해운 주간지 회사의 핵심은 기자임을 강조, 절대 타 부서 직원들이 대놓고 반말을 하는 등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할 경우 절대로 참지 말고 강하게 대응하라고 주문했다.
이런 기조를 유지하다보니 그 어떤 부서장도 해운 기자를 쉽게 대하지 못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해운기자들은 모두 필자를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물론 외신 기자들 중 상당수는 C국장의 지시에 철저히 순응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필자에게 C국장만 믿고 건방진 자세를 보이는 기자는 없었다.
물론 간혹 그런 기색을 보이는 여기자가 생기기도 했으나 초창기에 완전 박살내 버렸다. 대놓고 C국장 믿고 직속 상사인 필자를 가볍게 보는 것 자체가 해운 주간지 기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심하게 나무랐기 때문이다.
설사 C국장과 각별한 사이였어도 대의명분을 앞세운 필자의 질책을 반박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한 번 기가 꺽인 외신기자들은 C국장이 없는 공간에서는 그야말로 필자에게 그렇게 순종적일 수 없었다. 당연히 해운 주간지 편집국 소속 기자들을 컨트롤 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때로는 C국장의 총애를 받는 것이 필자에게 부담을 느끼는 여기자들의 경우, 필자에게 C국장의 과도한 여기자들에 대한 태도를 문제삼기까지 했다.

- 이종옥 발행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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