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필자는 햇수로 47년, 만으로 46년 해운 매체에 몸담고 있다. 반세기에 가까운 이 오랜 기간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해운인들을 만나 교류를 가져왔다.
이 중 인품이나 능력이 출중하여 오랜 세월 인연을 맺어왔던 '참 좋은' 해운인들을 회고해 보고자 한다. 필자가 발행인으로 등록되어 있는 신문 형태의 해운 주간지에 해운인들의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의도가 가장 크다. 다음으로 인터넷 신문인 'moowoon.com'에 수록함으로써 언젠가 누군가 예전의 원로 해운인 이름을 검색할 때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배려하는 차원에서 월 1회 연재키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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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인연을 맺은 해운인들에 대해 구체적인 얘기를 하기 앞서 필자의 자란 환경과 군 생활에 대해 소개하고 이런 시간들이 해운인들과 사귐에서 어떤 작용을 했는지 설명하기로 하겠다.
얼마 전 마감한 회고록 연재에서도 밝혔듯이 1899년생이신 부친과 1900년생이신 모친 사이에서 8남매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가장 큰 누님이 1917년생으로 이 누님의 자녀 중 3명의 조카가 필자보다 나이가 많았다.
첫째 여자조카가 10살, 둘째 여자조카가 7살, 셋째 남자 조카가 3살 손위였다. 하지만 필자의 중학교 입학 이후 이들 나이 많은 조카들은 필자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도록 모친은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 필자에게는 삼촌으로서의 권위 유지를 강조했다. 이런 지시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필자의 유년기는 다른 아이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어린이다운 행동, 즉 소꿉장난이나 장난스러운 언행을 하지 못하고 지냈다. 이런 것들이 얼마나 부정적인 성격을 형성하는지 후일 깨달을 수 있었다.
우선 다른 사람의 지시나 압박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 형성되었다. 동시에 입발린 소리나 거짓말을 절대 하지 못하는 기질을 갖게 되었다. 또 호불호가 분명해서 싫으면서도 내색하지 않는 포커페이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때문에 ROTC 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다. 또 층층시하의 일간지 및 방송 기자는 일찍부터 포기하고 선배 기자가 없는 해운 주간지의 한국 최초의 해운 취재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래서 해운기자를 시작한 70년대 초부터 연세가 많은 해운인들과 유난히 좋은 인연을 맺었다. 또한, 대학 시절 군대나 다름없는 기숙사 생활을 했던 해양대 출신 해운인들과 특별히 잘 사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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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생이신 주요한 회장을 처음 만난 시기는 1973년 연말이었다. 당시 주 회장은 한국 제 1의 선사였던 대한해운공사 사장이자 한국선주협회 회장으로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해운인이었다.
해운정책을 총괄하고 있는 교통부 김신 장관과 한국선주협회 주요한 회장, 한국선박대리점협회 전택보 회장, 그리고 해운조합 석두옥 이사장의 신년사는 반드시 게재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이 업무가 필자에게 주어졌다.
그래서 교통부 장관 비서실에 신년사 청탁 공문을 전달하고, 나중에 해운국 외항과 최훈 사무관으로 부터 원고를 수거했다. 또 전택보 회장의 신년사는 전 회장이 사장이던 천우사 심항섭 부장에게 전달하고 또 받아왔다. 해운조합의 경우는 누구에게 전하고 가져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주요한 회장에게 원고 청탁서를 전하기 위해 대한해운공사 사장 비서실에 가서 비서실장에게 주었더니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하더니 주 사장에게 간 뒤, 조금 후 나와서 필자에게 직접 전하도록 얘기하는 것 아닌가.
2선의 국회의원과 부흥부 장관을 지냈고 한국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의 저자이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을 역임, 당시 권위주의적 풍토의 사회적 명망가답지 않은 겸허한 자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수거도 마찬가지로 주 회장을 직접 뵙고 받아왔다. 더욱 놀라운 사항은, 원고 청탁을 한 해운인들 중 유일하게 마감 일자를 지킨 분이 바로 주 회장 한 분 뿐이었다.
그리고 한자 한 톨 없는 완전 한글로, 그것도 자신이 직접 원고지를 메꾼 원고여서 감동이 밀려왔다. 이후 주 회장에 관심이 가서 해공 임직원들에게 알아본 결과, 모두들 존경하는 CEO임을 알게 되어 더욱 놀랐다.
특히 일선 실무자와도 소통을 서슴지 않는 행보는 당시 대형 해운업 CEO로서는 보기 드문 케이스이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필자는 결혼식 때 주요한 회장을 주례로 모시는 기쁨도 누렸다.
- 이종옥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