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A부장은 차제에 완전히 해운 주간지로 전환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광고는 자신이 책임질 테니 주간 무역운송신문으로 새로이 변화하자는 주장이었다. 오랜 고심 끝에 필자는 A부장의 제안을 수용했다. 이것이 필자가 범한 두 번째 실수이기도 했다.
과거 필자를 배신한 L사장과 시작한 해운주간지는 당초 타블로이드 판형이었으나 신문 형태로 전환한 바 있어 이 일이 필자로 하여금 신문 형태 주간 무역운송신문으로 전환시키는 또 하나 요인이 되었다고 판단된다.
1
하지만 이미 신문 형태의 해운 주간지는 넘쳐나는 상황이어서 경영이 녹록치 않았다. 급기야 적자가 엄청나게 쌓여 처가 장모의 아파트를 담보로 거액을 대출받아 운영자금으로 쓰고 직원들의 보너스를 지급하기도 했다.
그렇게 회사 경영은 조금씩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와중에 IMF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급기야 매출이 반 토막 나서 어떻게 버텨볼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우선 기사 작성을 위해 채용했던 일선 기자들을 모두 내보냈다. 사무실도 폐쇄, 중증 장애인인 필자의 사정을 명분삼아 필자 집으로 사무실 주소를 옮겼다.
그러고도 A부장의 급여를 충당할 수 없어 들어오는 광고의 금액을 절반씩 나누자는 통고를 A부장에게 했다. A부장 역시 상황을 알아채고 이를 순순히 수용했다. 문제는 필자 가정의 생활이었다. 급기야 은행 대출이 어려워 카드사의 고금리(통상 18~20%) 차입금을 얻어 생활비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필자와 동갑인 필자 아내의 손위 오빠가 여동생인 아내를 상대로 사기극을 벌이는 일까지 벌어져 그야말로 질곡의 고난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아내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해 중병에 걸리고 말았다.
아내를 살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경주하는 한편, 회사 일은 A부장에게 거의 일임했다. 이것이 필자의 또 하나의 결정적 실수였다. 이 기회를 틈타 A부장은 회사 거래선을 찾아다니며 자신이 새로이 해운 주간지를 창간할 터이니 자신에게 광고를 옮겨달라고 제안하였던 것이었다.
더욱 괴로웠던 사실은 이 같은 A부장의 행보가 영향을 주었는지, 그나마 몇 년 동안 호전되어가던 아내의 병세가 다시 급격하게 악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병세 악화 이후 1년 가까이 투병한 끝에 아내는 2005년 12월 말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 딸을 두고 하늘나라로 이사 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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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끝에 결혼한, 또 필자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생의 동반자가 된 사연때문인지 31년의 결혼 생활 중 아내는 진심으로 필자를 사랑했음을 느껴온 바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필자를 존경한다는 극찬까지 들은 바 있다. 필자가 40대 중반에 혈액투석을 시작, 당시만 해도 그다지 오래 생존하지 못하는 질병이어서 주위에서 걱정을 많이했는데, 이를 감지한 아내는 필자가 가면 자신도 곧 뒤따라 가겠다고 결심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필자는 발병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딸과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아들이 장성할 때 까지는 절대로 그런 마음을 먹지 말라고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그러자 아내는 또 다시 필자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하였고, 그래서 필자는 내가 가고난 뒤 최소 10년은 참고 아이들이 장성한 뒤 그 때 하늘나라에서 만나자고 설득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내를 떠나보낸지 올 12월로 17년이 다 되어간다. 참으로 세상사는 인간의 뜻대로 되지 않음을 절감하고 있다.
필자가 간혹 아이들이나 주변의 가까운 지인들에게 아내를 얘기할 때 꼭 빠뜨리지 않고 언급하는 구절이 있다. “아내는 나의 배우자이자 애인이자 친구이자 누이 동생이었다. 뿐만 아니라 인생의 동반자요, 신앙의 동역자요, 위로자이자 운전기사였다.”라고 말하곤 했다. 필자 모친이 필자는 운전을 배우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아내가 운전을 하면서 살아있는 동안 늘 나를 태우고 병원으로 혹은 인터뷰 장소로 운전해 주곤 했다.
아내가 최초 발병했던 날은 서소문의 어느 해운회사 회장과 약속이 있어 서너시간 이상 주위의 한적한 곳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귀가한 날이었다. 갑자기 몸에 큰 이상이 생겨 인근 대형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이 때는 맏사위가 운전을 해주었다. 이렇게 아내가 소중한 존재임을 주변의 알만한 친인척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내가 가고 난 뒤 처제가 필자 몰래 딸 부부 내외와 아들을 불러놓고 아버지가 곧 엄마를 뒤따라 갈 것 같으니 유념해서 살펴보라는 당부까지 할 정도였다. 이 말을 훗날 딸로 부터 듣고는 필자는 피식 웃었다. 아내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지금도 강렬하지만, 필자는 신앙인으로서 인간의 삶과 죽음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아들은 대학에서 정보통신공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아내가 타계하자 필자 회사에서 취재와 편집 업무를 전담하게 되었다. 핏줄은 어쩔 수 없는지 글 쓰는 DNA가 출중하여 필자 못지 않은 필력을 해운 업계로 부터 인정받고 있다. 이 일이 필자를 지금까지 버티게 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모든 기업이 그러하듯 2세가 가업을 이을 수 있는 경우는 창업자로서 가장 보람있는 일이다. 무엇보다 한국 최초의 해운 주간지에서 공채기자로, 또 해운기자 1호였던 필자로서는 아들이 해운 주간지를 이어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뿌듯할 수 없다. 이 일로 필자는 2세 해운 경영인들에게 회사를 맡긴 1세대 해운 기업 창업자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 이종옥 발행인 -
그러자 A부장은 차제에 완전히 해운 주간지로 전환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광고는 자신이 책임질 테니 주간 무역운송신문으로 새로이 변화하자는 주장이었다. 오랜 고심 끝에 필자는 A부장의 제안을 수용했다. 이것이 필자가 범한 두 번째 실수이기도 했다.
과거 필자를 배신한 L사장과 시작한 해운주간지는 당초 타블로이드 판형이었으나 신문 형태로 전환한 바 있어 이 일이 필자로 하여금 신문 형태 주간 무역운송신문으로 전환시키는 또 하나 요인이 되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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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미 신문 형태의 해운 주간지는 넘쳐나는 상황이어서 경영이 녹록치 않았다. 급기야 적자가 엄청나게 쌓여 처가 장모의 아파트를 담보로 거액을 대출받아 운영자금으로 쓰고 직원들의 보너스를 지급하기도 했다.
그렇게 회사 경영은 조금씩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와중에 IMF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급기야 매출이 반 토막 나서 어떻게 버텨볼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우선 기사 작성을 위해 채용했던 일선 기자들을 모두 내보냈다. 사무실도 폐쇄, 중증 장애인인 필자의 사정을 명분삼아 필자 집으로 사무실 주소를 옮겼다.
그러고도 A부장의 급여를 충당할 수 없어 들어오는 광고의 금액을 절반씩 나누자는 통고를 A부장에게 했다. A부장 역시 상황을 알아채고 이를 순순히 수용했다. 문제는 필자 가정의 생활이었다. 급기야 은행 대출이 어려워 카드사의 고금리(통상 18~20%) 차입금을 얻어 생활비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필자와 동갑인 필자 아내의 손위 오빠가 여동생인 아내를 상대로 사기극을 벌이는 일까지 벌어져 그야말로 질곡의 고난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아내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해 중병에 걸리고 말았다.
아내를 살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경주하는 한편, 회사 일은 A부장에게 거의 일임했다. 이것이 필자의 또 하나의 결정적 실수였다. 이 기회를 틈타 A부장은 회사 거래선을 찾아다니며 자신이 새로이 해운 주간지를 창간할 터이니 자신에게 광고를 옮겨달라고 제안하였던 것이었다.
더욱 괴로웠던 사실은 이 같은 A부장의 행보가 영향을 주었는지, 그나마 몇 년 동안 호전되어가던 아내의 병세가 다시 급격하게 악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병세 악화 이후 1년 가까이 투병한 끝에 아내는 2005년 12월 말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 딸을 두고 하늘나라로 이사 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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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끝에 결혼한, 또 필자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생의 동반자가 된 사연때문인지 31년의 결혼 생활 중 아내는 진심으로 필자를 사랑했음을 느껴온 바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필자를 존경한다는 극찬까지 들은 바 있다. 필자가 40대 중반에 혈액투석을 시작, 당시만 해도 그다지 오래 생존하지 못하는 질병이어서 주위에서 걱정을 많이했는데, 이를 감지한 아내는 필자가 가면 자신도 곧 뒤따라 가겠다고 결심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필자는 발병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딸과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아들이 장성할 때 까지는 절대로 그런 마음을 먹지 말라고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그러자 아내는 또 다시 필자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하였고, 그래서 필자는 내가 가고난 뒤 최소 10년은 참고 아이들이 장성한 뒤 그 때 하늘나라에서 만나자고 설득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내를 떠나보낸지 올 12월로 17년이 다 되어간다. 참으로 세상사는 인간의 뜻대로 되지 않음을 절감하고 있다.
필자가 간혹 아이들이나 주변의 가까운 지인들에게 아내를 얘기할 때 꼭 빠뜨리지 않고 언급하는 구절이 있다. “아내는 나의 배우자이자 애인이자 친구이자 누이 동생이었다. 뿐만 아니라 인생의 동반자요, 신앙의 동역자요, 위로자이자 운전기사였다.”라고 말하곤 했다. 필자 모친이 필자는 운전을 배우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아내가 운전을 하면서 살아있는 동안 늘 나를 태우고 병원으로 혹은 인터뷰 장소로 운전해 주곤 했다.
아내가 최초 발병했던 날은 서소문의 어느 해운회사 회장과 약속이 있어 서너시간 이상 주위의 한적한 곳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귀가한 날이었다. 갑자기 몸에 큰 이상이 생겨 인근 대형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이 때는 맏사위가 운전을 해주었다. 이렇게 아내가 소중한 존재임을 주변의 알만한 친인척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내가 가고 난 뒤 처제가 필자 몰래 딸 부부 내외와 아들을 불러놓고 아버지가 곧 엄마를 뒤따라 갈 것 같으니 유념해서 살펴보라는 당부까지 할 정도였다. 이 말을 훗날 딸로 부터 듣고는 필자는 피식 웃었다. 아내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지금도 강렬하지만, 필자는 신앙인으로서 인간의 삶과 죽음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아들은 대학에서 정보통신공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아내가 타계하자 필자 회사에서 취재와 편집 업무를 전담하게 되었다. 핏줄은 어쩔 수 없는지 글 쓰는 DNA가 출중하여 필자 못지 않은 필력을 해운 업계로 부터 인정받고 있다. 이 일이 필자를 지금까지 버티게 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모든 기업이 그러하듯 2세가 가업을 이을 수 있는 경우는 창업자로서 가장 보람있는 일이다. 무엇보다 한국 최초의 해운 주간지에서 공채기자로, 또 해운기자 1호였던 필자로서는 아들이 해운 주간지를 이어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뿌듯할 수 없다. 이 일로 필자는 2세 해운 경영인들에게 회사를 맡긴 1세대 해운 기업 창업자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 이종옥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