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 당시 해양대 출신 해운 경영인 대부분은 필자가 한국 최초 해운 주간지 편집국장(편집부장 또는 편집이사) 시절 해운계에서 육상근무를 시작한 분들이었다. 승선 경력이 많아 필자와 연배가 비슷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젊은 해운 경영인들이었다.
필자는 이 분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분들은 필자의 기획기사(기명)를 읽어 필자의 이름에 익숙해진 해운 경영인들이어서 반갑게 맞아준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조심스럽게 꺼낸 광고 얘기를 어떠한 토를 달지 않고 그대로 수용해 주었다. 무엇보다 이들 해양대 출신 해운 경영인들은 필자의 칼럼 등을 통해 필자가 해양대 출신 해운인들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음을 파악, 필자를 도와주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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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서 회사 경영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항공화물 분야에 출입한 여기자도 경력이 1년 정도 지나자 제법 의미 있는 기사를 취재, 작성하기 시작했다. 또 워낙 사교성이 좋아 광고를 간혹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기자가 느닷없는 제의를 해 왔다. 자신이 기사 취재 작성 외에 광고에도 적극 참여할 터이니 자신이 수주한 광고의 30%를 리베이트로 달라는 것이었다. 해운계 리베이트 관행에 대해 자주 비판하던 필자로서는 난감했다. 기자가 드물게 스스로 광고를 하겠다는데 사기를 꺾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리베이트라해도 부정한 방법이 아니고 필자가 30%만큼 수익에 손해를 보는 케이스여서 고심 끝에 허락했다. 그러자 신난 여기자는 지속적으로 광고를 수주해 왔다. 그래서 어떤 달에는 급여보다 광고 리베이트가 더 많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격주간 무역운송의 경영이 안정화되자 필자는 그동안 중단했던 ‘해운인 평전’ 저술에 매진할 수 있었다. 80년대 초부터 시작한 이 작업은 그동안 20여 명의 원로 해운인들의 일생을 다룬 바 있었다. 여기에 더 해서 현역 해운 경영인들의 해운인생까지 지면이 많은 잡지형 격주간 무역운송에 연재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즈음 연재를 시작한 현역 해운 경영인으로는 조상욱 두양상선 사장, 배주원 아신해운 사장 등이 기억난다.
이로 인한 성과도 대단했다. 통상 4-5회 이상 연재하는 형태로 인해 연재가 끝나면 필자가 얘기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광고 게재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원고료 대신 받는다는 명분이어서 참으로 보람 있는 일이기도 했다. 여기에 여기자의 항공화물 분야 광고도 계속되어 오랜만에 편안하고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A라는 인물이 필자를 찾아왔다. A는 필자가 한국 최초 해운 주간지에서 편집인 겸 상무이사로 재직할 당시 신입기자로 들어온 인물이었다. 필자와 동업을 하다 배신한 신생 해운주간지 L씨 밑에서 편집차장으로 실질적인 편집국장 역할을 해 온 터라 잘 지내는 것으로 생각했던 차 급작스러운 방문은 상당히 의아했다.
A차장은 필자를 배신한 L사장이 급여도 제대로 주지 않고 근무 여건도 좋지 않아 더 이상 근무하기가 힘들다면서 필자 밑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해 왔다. 필자가 난색을 표하자 자신에게 부장 타이틀을 주어 근무시켜 주면 해운 분야의 취재는 물론이고 받은 급여의 두 배 정도의 광고 유치까지 해오겠다면서 필자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결국 A를 부장으로 새로이 합류시켰는데 후일 이 조치가 얼마나 잘못된 결정이었는지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A부장은 자신이 장담했던 두 배는 아니었지만 나름 급여 몫 정도는 하는 등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자신과 함께 L사장 밑에서 근무하던 B차장도 데리고 오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해 왔다. 그러면서 B차장까지 필자 회사로 오면 필자를 배신한 L사장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몰릴 수밖에 없다는 달콤한 말까지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 B차장은 이미 해운 및 항공 두 분야 광고에 오랜 경력을 가지고 있어 광고 수주가 그야말로 확실한 인물이라는 부언도 잊지 않았다.
그러고도 A부장은 신인 소설가로 등단한 실력자를 기자로 채용, 자신은 회사 수익 증대(광고)에 보다 치중하겠다는 달콤한 제의도 잊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A부장은 B영업차장과 C기자 등 자신을 따르는 3명의 핵심 요원을 필자 밑에 근무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A부장은 필자가 차장으로 승진시켜 항공 분야 출입하는 여기자에게 광고 금액의 30%를 주는 조치의 부작용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 기회에 폐지, 나머지 직원들의 사기 저하를 막아야 한다고 건의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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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부장의 이 같은 건의를 알게 된 여기자는 크게 난감해 했다. 자신은 기사 취재와 작성 외 별도의 노력으로 어렵게 수주한 만큼 광고료의 30%를 보상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을 했다. 급기야 A부장과 여기자는 견훤지간의 사이가 되어 사사건건 회사에서 부딪히는 사태를 야기했다. 이에 필자가 A부장에게 여기자가 수주하는 광고가 매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회사 차원에서 결정하기는 쉽지 않다고 설득, A부장이 양보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자 A부장은 이번에는 리베이트를 10% 수준으로 낮추자는 수정안을 제시해 왔다. 하지만 여기자는 수용할 수 없다고 버티는 와중에 기분이 상한 여기자는 사표를 내고 떠났다. A부장이 유도한 측면이 많았다.
이렇게 되자 그동안 여기자로 인해 들어왔던 광고가 중단되어 매출이 급격하게 감소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A부장이 장담해 왔던 B영업차장의 영업실적이 곤두박질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급기야 필자는 우선 급한 운영자금 확보를 위해 신용보증기금 보증서를 담보로 은행에서 자금을 차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필자는 주 3회 혈액투석을 해야 하는 만큼 필자를 대신할 A부장의 역할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투석하지 않는 월·수·금요일에는 매일 회사로 출근했으나 별다른 대안을 A부장은 제시하지 못했다. 필자가 A부장과 B차장에게 질책을 가하기 시작하자 B차장은 사직서를 내고 회사를 떠났다.
- 이종옥 발행인 -
90년대 초 당시 해양대 출신 해운 경영인 대부분은 필자가 한국 최초 해운 주간지 편집국장(편집부장 또는 편집이사) 시절 해운계에서 육상근무를 시작한 분들이었다. 승선 경력이 많아 필자와 연배가 비슷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젊은 해운 경영인들이었다.
필자는 이 분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분들은 필자의 기획기사(기명)를 읽어 필자의 이름에 익숙해진 해운 경영인들이어서 반갑게 맞아준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조심스럽게 꺼낸 광고 얘기를 어떠한 토를 달지 않고 그대로 수용해 주었다. 무엇보다 이들 해양대 출신 해운 경영인들은 필자의 칼럼 등을 통해 필자가 해양대 출신 해운인들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음을 파악, 필자를 도와주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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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서 회사 경영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항공화물 분야에 출입한 여기자도 경력이 1년 정도 지나자 제법 의미 있는 기사를 취재, 작성하기 시작했다. 또 워낙 사교성이 좋아 광고를 간혹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기자가 느닷없는 제의를 해 왔다. 자신이 기사 취재 작성 외에 광고에도 적극 참여할 터이니 자신이 수주한 광고의 30%를 리베이트로 달라는 것이었다. 해운계 리베이트 관행에 대해 자주 비판하던 필자로서는 난감했다. 기자가 드물게 스스로 광고를 하겠다는데 사기를 꺾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리베이트라해도 부정한 방법이 아니고 필자가 30%만큼 수익에 손해를 보는 케이스여서 고심 끝에 허락했다. 그러자 신난 여기자는 지속적으로 광고를 수주해 왔다. 그래서 어떤 달에는 급여보다 광고 리베이트가 더 많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격주간 무역운송의 경영이 안정화되자 필자는 그동안 중단했던 ‘해운인 평전’ 저술에 매진할 수 있었다. 80년대 초부터 시작한 이 작업은 그동안 20여 명의 원로 해운인들의 일생을 다룬 바 있었다. 여기에 더 해서 현역 해운 경영인들의 해운인생까지 지면이 많은 잡지형 격주간 무역운송에 연재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즈음 연재를 시작한 현역 해운 경영인으로는 조상욱 두양상선 사장, 배주원 아신해운 사장 등이 기억난다.
이로 인한 성과도 대단했다. 통상 4-5회 이상 연재하는 형태로 인해 연재가 끝나면 필자가 얘기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광고 게재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원고료 대신 받는다는 명분이어서 참으로 보람 있는 일이기도 했다. 여기에 여기자의 항공화물 분야 광고도 계속되어 오랜만에 편안하고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A라는 인물이 필자를 찾아왔다. A는 필자가 한국 최초 해운 주간지에서 편집인 겸 상무이사로 재직할 당시 신입기자로 들어온 인물이었다. 필자와 동업을 하다 배신한 신생 해운주간지 L씨 밑에서 편집차장으로 실질적인 편집국장 역할을 해 온 터라 잘 지내는 것으로 생각했던 차 급작스러운 방문은 상당히 의아했다.
A차장은 필자를 배신한 L사장이 급여도 제대로 주지 않고 근무 여건도 좋지 않아 더 이상 근무하기가 힘들다면서 필자 밑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해 왔다. 필자가 난색을 표하자 자신에게 부장 타이틀을 주어 근무시켜 주면 해운 분야의 취재는 물론이고 받은 급여의 두 배 정도의 광고 유치까지 해오겠다면서 필자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결국 A를 부장으로 새로이 합류시켰는데 후일 이 조치가 얼마나 잘못된 결정이었는지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A부장은 자신이 장담했던 두 배는 아니었지만 나름 급여 몫 정도는 하는 등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자신과 함께 L사장 밑에서 근무하던 B차장도 데리고 오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해 왔다. 그러면서 B차장까지 필자 회사로 오면 필자를 배신한 L사장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몰릴 수밖에 없다는 달콤한 말까지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 B차장은 이미 해운 및 항공 두 분야 광고에 오랜 경력을 가지고 있어 광고 수주가 그야말로 확실한 인물이라는 부언도 잊지 않았다.
그러고도 A부장은 신인 소설가로 등단한 실력자를 기자로 채용, 자신은 회사 수익 증대(광고)에 보다 치중하겠다는 달콤한 제의도 잊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A부장은 B영업차장과 C기자 등 자신을 따르는 3명의 핵심 요원을 필자 밑에 근무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A부장은 필자가 차장으로 승진시켜 항공 분야 출입하는 여기자에게 광고 금액의 30%를 주는 조치의 부작용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 기회에 폐지, 나머지 직원들의 사기 저하를 막아야 한다고 건의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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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부장의 이 같은 건의를 알게 된 여기자는 크게 난감해 했다. 자신은 기사 취재와 작성 외 별도의 노력으로 어렵게 수주한 만큼 광고료의 30%를 보상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을 했다. 급기야 A부장과 여기자는 견훤지간의 사이가 되어 사사건건 회사에서 부딪히는 사태를 야기했다. 이에 필자가 A부장에게 여기자가 수주하는 광고가 매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회사 차원에서 결정하기는 쉽지 않다고 설득, A부장이 양보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자 A부장은 이번에는 리베이트를 10% 수준으로 낮추자는 수정안을 제시해 왔다. 하지만 여기자는 수용할 수 없다고 버티는 와중에 기분이 상한 여기자는 사표를 내고 떠났다. A부장이 유도한 측면이 많았다.
이렇게 되자 그동안 여기자로 인해 들어왔던 광고가 중단되어 매출이 급격하게 감소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A부장이 장담해 왔던 B영업차장의 영업실적이 곤두박질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급기야 필자는 우선 급한 운영자금 확보를 위해 신용보증기금 보증서를 담보로 은행에서 자금을 차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필자는 주 3회 혈액투석을 해야 하는 만큼 필자를 대신할 A부장의 역할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투석하지 않는 월·수·금요일에는 매일 회사로 출근했으나 별다른 대안을 A부장은 제시하지 못했다. 필자가 A부장과 B차장에게 질책을 가하기 시작하자 B차장은 사직서를 내고 회사를 떠났다.
- 이종옥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