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서야 속은 것을 알고 몇몇 지인에게 전화해서 상황을 설명하고 대응책을 물었다. 그러면서 경리과장에게 사장 어디 있느냐고 다그쳤으나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또 공고문은 이미 사장이 떠나기 전 오늘 게시판에 부착할 것을 지시받았다는 것이었다.
완전히 계획적인 술수였다. 필자의 다급한 물음에 상당수 지인들이 ‘원인무효소송’을 하면 주식은 되찾을 수 있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면서 비상장주식이라면 송사에 비해 실익이 없다는 부언설명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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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이 같은 상황에 필자는 무엇보다 십 수 년의 친구에게 철저하게 배신당했다는 점에 치를 떨었다. 그리고 완전 맥이 풀렸다. 실익 없는 분쟁에 휩싸이는 것도, 또 이를 감내해야 하는 직원들의 고충도 감안하여 회사내 모든 사물을 챙겨 집으로 와 버렸고 더 이상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는 충격에 망연자실, 그냥 드러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에 이상 신호가 울렸다. 먼저 왼쪽 눈 망막이 망가지고 만 것이다. 그리고 혈압도 지극히 정상에서 고혈압으로 한 순간에 나빠져버렸다. 다행히 셋째 매형이 종로에서 안과의원을 하고 있어 매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혈압 증상은 계속 유지되었다. 이때부터 꾸준히 고혈압 약을 복용해야 함에도 이후 다시 피고용인 세월이 시작되면서 유념하는 자세를 갖지 못했다.
동향 친구의 배신으로 만사가 귀찮아 집에서 더러 누워있는데 당시 주 2회 발간하는 신생 해운 주간지 최고 경영자 Y주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시청 앞 어느 찻집에서 만났는데 Y주간은 자신의 해운 주간지로 출근해 달라는 제의였다.
그러면서 현재는 편집국장이 근무하고 있으니 우선 논설위원 겸 출판국장으로 지내다 편집국장을 맡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얘기였다. 이에 필자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을 달았다. 별도의 근무 공간을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Y주간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막상 출근을 하고 보니 Y주간을 비롯해서 임원 1명이 넓은 공간에 회의실과 함께 임원실을 꾸며 함께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필자의 책상도 그 곳 J임원 옆에 배치해 놓았다. 이렇게 H 해운 주간지에 나가게 되었는데, Y주간은 필자에게 주 2회 발행하는 신문 형태의 주간지에 사설, 시론, 칼럼 두 가지 등 엄청난 분량의 원고 작성을 요구했다.
모두 주 2회로 칼럼은 해운 관련 전 세계적 주요 기록 및 상황을 담은 ‘나침판’, 그리고 또 하나는 가십성의 ‘동서남북’ 등이었다. 흔히 일간지 등에서 모두 게재하고 있는 형태였다. 글쓰기를 좋아하고 일찍부터 한국 최초 해운 주간지에서 엄청난 분량의 기사 작성을 해왔던 터라 그다지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그 모든 원고 작성을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감당했다.
다만 모든 원고를 최종적으로 Y주간에게 넘겨 한번 체크를 받는 식이어서 자존심이 상했지만 참았다. Y주간은 해운에는 전혀 전문성이 없는 관세회보 편집인 출신으로 60년대 합동통신에서 경제부 기자로 재직한 바 있었다. 마침 필자의 친형이 합동통신 편집국에 근무하다 중앙일보로 옮긴 뒤 정년퇴직하고 정신문화연구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래서 친형에게 Y주간에 대해 물어보았다. 형님의 대답은 “기자이되 기사를 쓰는 기자가 아닌 영업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라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이에 필자가 어느 날 Y주간에게 친형의 성함을 얘기했더니 함께 근무한 적이 있어서 잘 안다며 반색을 하기도 했다. Y주간은 필자의 원고를 한 번 읽어보고 편집국장에게 넘기는 수순을 밟았는데 때로는 해운이 아닌 경제 분야의 사항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지식을 말하기도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파급효과’라는 단어에 대한 지적이었다. 긍정적 영향을 나타낼 때 사용함이 바르다는 것으로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는 파급효과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음이 올바른 표현이라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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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정신없이 원고 작성에 매달리던 어느 날 갑자기 망막에 이상이 생긴 왼쪽 눈이 완전 보이지 않았다. 캄캄한 터널에 들어서면 간신히 불빛이 보일 정도일 뿐 전혀 사물을 분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른쪽 눈은 이상이 없어서 한 눈으로 원고를 작성했지만 아무래도 불편해서 원고지 작성은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촘촘한 원고지에 글씨를 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에 백지에 큰 글씨로 글을 쓰면 이를 받아 집사람이 원고지에 기입하는 형태를 취했다.
집사람은 어려서 부터 조부로 부터 한문을 배운 적이 있어 한자 실력이 대단했다. 붓글씨도 아주 잘 쓰는 편이었다. 그래서 교회에서 공로패와 화환 등에 붓글씨를 자주 써주곤 했다. 한글의 필체도 뛰어나서 솔직히 필자 보다 훨씬 더 호방하고 뛰어난 원고 작성이 가능한 특별한 재주를 가진 바 있었다. 이에 해운 주간지의 Y주간이나 J임원 등은 필자의 원고를 보고 예전과 다르다며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기에 전후사정을 얘기했더니 집사람의 글씨체에 찬사를 잊지 않았다.
이렇게 몇 달이 흐르자 기존의 편집국장이 사직, 막 창간한 H신문이라는 해운 전문지 편집국장으로 전보되었다. 그리고 필자가 편집국장을 맡아 업무를 시작했는데, 주간지 자체 기사 분량이 워낙 많아 이를 모두 읽고 수정하는 데에는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었다. 더 이상 필자 자신의 원고 작성이 불가능했고 기자들의 원고를 체크하고 게재하는 업무에만 몰두했다.
이 때 H신문 편집국 기자는 함 모 취재부장을 비롯해서, 정 모 기자, 김 모 기자 등이 기억난다. 함 부장은 80년대 중반 시사통신 해운파트 기자를 지낸 바 있어 해운 전문성이나 원고 작성 수준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또 다른 기자 한 명의 원고는 기사로서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정도의 ‘황당’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Y주간과의 인연으로 해운 주간지에 들어온 것이다. 이 친구는 한국 최초 해운 주간지 편집자인 필자 밑에서 기자로 근무했던 손 모 기자가 편집 책임자로 일했던 해운 스케줄 주간지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었다.
이 기자는 Y주간처럼 기사 작성보다는 영업에 더 큰 소질이 있었다. 당연히 Y주간이 총애, 함께 Y주간 출퇴근 자가용을 타고 출근했다. 그리고 수주해 오는 광고 금액의 30%를 리베이트로 챙겨갔다.
이렇게 H신문에서 한 2년 정도 근무하면서 필자는 한 번도 급여는 받아본 적이 없었다. 다행히 과거에 근무하던 한국 최초 해운 주간지 주식 10%를 넘기면서 매달 100만원씩 수령하기로 되어있어 이를 급여로 대처, 집사람에게 주었다. 80년대 후반 당시 100만원은 결코 적은 액수는 아니었다. 그런데 H신문 Y주간은 급여를 줄 생각 자체가 없는 것 같아 정말로 ‘황당’했다. 이에 J임원에게 이 상황을 얘기해봤더니 자신도 지금까지 한 번도 급여를 받지 못했다는 대답을 듣고 더욱 놀라고 말았다.
- 이종옥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