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운 칼럼] 따스한 인정 넘친 해운 경영인들(1)

취재부
2018-02-06
해운기자로 또는 해운 전문지 편집국장과 발행인으로 살아온 지 45년(햇수로는 46년)이 되다보니 해운인들과 오랜 교분관계를 지속해 왔다. 물론 70년대부터 40여년 넘게 친분을 쌓았던 대부분의 해운인들은 타계 또는 은퇴 등으로 지금은 만나볼 수 조차 없다.
이렇게 십 수 년에서 반세기에 가까운 긴 세월동안 필자의 처지도 변화무쌍했었다. 70년대부터 80년대 후반까지는 해운인들을 도와주는 역할이 많았다. 그리고 92년 필자가 해운 전문지를 인수, 사주가 된 뒤에는 해운인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1

해운인들, 그 중에서도 해운 경영인들 가운데 필자의 처지에 따라 한 순간에 돌변하는 적지 않은 해운 경영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반면 70-80년대의 그 따스한 인간미는 시종일관 유지해 주었던 해운인들도 적지 않았다. 오늘은 그런 따스한 인정이 넘쳤던 해운인들을 타계, 은퇴, 현역으로 구분, 대표적인 분들을 소개해 볼 까 한다.
먼저 필자가 초창기 어떻게 해운인들의 도우미가 되었는지부터 설명하고자 한다. 언젠가 한번 언급했듯이 필자는 해운계보다 무역업계를 먼저 출입했다. 공채 신입기자로 입사하자마자 부여받은 임무가 "선적 책임자 순방"이라는 하주 인터뷰 시리즈였기 때문이다. 캐리어들에게 고객으로 절대적 영향력을 미치는 하주들의 인터뷰 기사는 해운계의 가히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이렇게 매주 한 하주씩 인터뷰 기사를 게재하다보니 어느 사이에 선사 영업 책임자들 못지않게 국내 주요 무역회사의 선적 책임자들과 모두 친하게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74년에는 한국 최초의 선하주 좌담회를 개최, 사회를 보기도 했다.
이어 하주와 선사 실무 책임자간 대담 프로인 "선적 대담"을 매주 연재하는가 하면 하주들의 선적상 애로사항을 청취, 기사화한 "선적 춘추"라는 연재물로 기획, 보도한 바 있었다.
이렇게 국내 주요 무역회사 선적 책임자들과의 교분이 쌓아지자 70년대 유행했던 주요 정기 라인들의 하주 사은파티에 참석하면 국내 어떤 선사 영업책임자보다 하주들을 더 많이 알고 있는 주인공이 바로 필자였다. 또 자신의 인터뷰 기사에 만족감을 느낀 일부 하주들은 필자 사무실로 직접 찾아오기 까지 했었다.
이로 인해 한국에서 정기선 서비스를 처음 시작하는 라인의 영업담당 임원이나 간부들이 필자에게 자신들이 타깃으로 삼은 국내 하주들과 술 한 잔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곤 했었다. 무조건 다 응낙한 것은 아니었다. 필자의 판단으로 신뢰성 있는 캐리어들의 요청은 성사시켜 주었다.
특히 76년 해운항만청 발족과 더불어 해상운송주선업 면허 제도로 해상포워딩 업체들이 등장했을 때 이들 회사의 최고 경영자들 다수는 유일한 해운 주간지에 광고를 게재하고자 필자에게 도움을 청하기 일쑤였다.
기사면 보다 광고 면이 더 많아서는 안 되는 규정 때문에 신생 포워더들 중 상당수는 광고 게재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해프닝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또 광고 게재 요청이 쇄도하다보니 광고 요율도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어떤 해상 포워더 창업자는 필자에게 광고료 인하를 간곡히 요청하는 일까지 전개되었다. 

2

세상사 참으로 묘한 바는 그렇게 이모저모 필자에게 도움을 받았던 해운인들이 막상 필자가 해운주간지를 인수, 인사차 찾아갔을 때 아주 냉정하게 대하는 바람에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반면 시종일관 동일한 자세로 따스한 인간미를 남김없이 보여주었던 해운 경영인들로 다수 있었다. 우선 타계한 해운인으로 그러한 인정 넘치는 세 분을 기억하고자 한다. 먼저 70년대를 대표한 한국 해운인이었던 대한해운공사 사장이자 한국선주협회 회장으로 오랫동안 계셨던 주요한 회장을 들 수 있다.
언론인이자 시인이었고 국회의원과 부흥부 장관을 역임했던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주 회장은 이제 막 해운기자를 시작한 필자를 직접 만나주었을 뿐 아니라 원고 청탁 시 정확한 날짜에 순 한글의 문장체 원고를 건네주었던 참으로 따스한 해운인이었다. 이를 인연으로 필자의 결혼식 주례까지 맡아주신 분이 바로 주요한 회장이셨다.
또 한 분 천경해운 창업자 김윤석 회장을 빠뜨려 놓을 수 없다. 김 회장은 말단 직원이라도 상을 당하면 반드시 문상을 갔다. 이런 직원 사랑이 결핵을 앓게 된 여비서를 10년 동안 돌봐주는 인정으로 이어졌다. 그 밖에 보승빌딩 전 주인의 아들을 여러 차례 도와주는 인정 넘치는 행보로 이어졌던 바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타계한 최경규 회장도 정이 넘치는 해운인이었다. 고려해운 임원을 거쳐 고려해운 계열사로 일본선사 NYK의 한국 대리점이었던 소양해운 회장으로 은퇴했다. 은퇴 후에도 강남의 어느 음식점에서 필자와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다. "던진 만큼 되돌아온다."는 인간관계의 신조를 지켜 누구든 상대를 편하게 해 주었던 인정 많은 해운인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은퇴한 해운인으로 인정이 넘쳤던 분들 이야기이다. 먼저 해양대 2기로 대한선주 부사장과 동남아해운 부사장을 역임한 후 은퇴한 박재혁 부사장 역시 인간미가 출중했던 해운인이었다. 
대한선주 부사장 시절 연락 없이 찾아간 필자를 만나주기 위해 회의실을 잠시 빠져나와 복도에서 대화를 했던 기억이 있을 정도이다. 동남아해운 재직 시 양재원 회장과 박재혁 부사장, 그리고 필자 세 사람이 세검정의 장어구이 집에 갔던 기억이 있다. 인간관계가 참으로 부드러운 분으로 지난 해 해대 동기인 KCTC 신태범 회장실에서 우연히 조우,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은퇴한 해운인으로 필자에게 참으로 따스한 인정을 베풀어 준 해운인으로 아신해운 창업자이자 APL 회장으로 은퇴한 배주원 회장이 있다. 이 분과의 일화는 한번 소개한 바 있어 생략하겠다. 현역으로 계실 때 필자가 사전에 연락 없이 찾아가도 한결같이 반가이 맞아 준 분이 배주원 회장이셨다. 필자의 도움 요청에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는 인정 많은 분이기도 하다.
또 한 분 이윤수 전 KCTC 부회장도 은퇴한 후 배주원 회장 일행과 한번, 또 유니버살로지스틱스그룹 이용기 회장과 함께 식사한 적이 있을 정도로 필자와는 40년 이상의 남다른 교분 관계를 맺은 바 있는 인간미 풍부한 해운인이 바로 이윤수 부회장이다. 이윤수 부회장과는 70-80년대 해운인 좌담회도 여러 번 가진 바 있었다. 해양대 12기를 1등으로 졸업한 명석한 두뇌로 해운 이론가로 명성을 펼치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역 해운 경영인으로 인정미 넘치는 세 분 왕상은 협성(범주)해운 창업자, 그리고 KCTC 신태범 회장과 유니버살로지스틱스 이용기 회장 등 인정 많은 세 분 현역 해운인에 대한 사연은 다음 호에 소개하기로 한다.

- 이종옥 발행인 -

인기기사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