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초 처음 해운 기자 생활을 시작했을 때이다. 가장 빈번하게 출입했던 해운 회사가 당시 국내 최대 원양 정기항로 취항사였던 대한해운공사(해공)로 일주일에 서너 번은 반드시 들려 취재를 했다. 한국 외항해운계의 현안이자 해공의 숙원사업이기도 했던 대형 풀 컨선 도입에 관한 기사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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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전 세계 정기항로를 강타했던 해상 운송의 컨테이너화는 70년대 들어 전 세계 대부분의 정기항로에서 이미 보편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해상 운송의 컨 시스템에는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컨테이너 터미널 시설, 즉 대형 풀 컨이 접안 가능한 부두 시설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이 시설은 단 시일에 완공할 수 없어 한국 항만 어디에서도 컨테이너 터미널 시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히 한국 최대의 원양 정기선사인 해공 역시 재래선으로 극동-북미 항로에 취항 중이었다. 그래서 해공으로서도 한시 바삐 대형 풀 컨으로의 전환이 당면과제였다. 자본의 취약으로 신조 풀 컨선 건조는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정부의 정책적 지원도 경제 규모 상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이에 대안으로 떠오른 방책이 대형 중고 풀 컨선의 도입이었다. 도입선을 물색, 여러 차례 협상을 전개한 끝에 대형 풀 컨선을 다량 보유하고 있는 홍콩선사 OOCL과 협상이 수 년 동안 계속되고 있던 상황이기도 했다. 따라서 70년대 한국 외항해운계의 가장 핫한 해운 뉴스는 해공과 OOCL간 협상 진행 사정이었다.
해공과 OOCL간 협상 외 국적선사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해운 기사는 한일간 소형 피더 컨테이너선 도입이 큰 이슈였다. 그리고는 해운 당국의 해운 정책이 해운기자로서는 관심사이기도 했다. 76년 해운항만청이 발족하기 전까지는 교통부 해운국 외항과에서 발표하는 해운 정책이 주요 뉴스였는데 주요 일간 경제지와 일간 통신사의 단골 기사이기도 했다.
이 외의 해운기사로는 당시 한국 외항해운계를 주도하고 있던 선박대리점업계 동향이 가장 큰 뉴스였다. 그런데 이 같은 대리점선사 뉴스는 외국 대형 및 중견 정기선사들의 한국 진출과 이에 따른 한국GSA 선정 외에는 별다른 이슈가 없었다.
기사 비중으로 보면 해공과 OOCL간 협상이 최대치여서 필자 역시 협상 실무를 주도하고 있던 당시 해공의 지홍식 업무과장을 수시로 찾아가곤 했었다. 동시에 선주협회 회장을 겸하고 있던 주요한 해공 사장에 관련된 취재 또한 필수적이었다.
이 때 해공은 덕수궁 옆 대한일보빌딩 전체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장실과 기획실이 맨 위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또 기획실 조사과에서 해운 전문지를 포함, 경제지 해운 담당 기자를 응대하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일간 경제지나 통신사 기자들은 가끔 출입했으나 필자는 자주 드나들다보니 자연스럽게 친숙한 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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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외항해운 역사에 있어 해공이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다대하다 아니할 수 없었다. 50년대부터 70년대를 거쳐 80년대 중반까지 한국 외항해운을 해공이 이끌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국적 원양 정기 취항 선사는 해공이 유일했고 또 보유선대 규모 면에서도 해공이 단연 톱이었다.
무엇보다 1950년 정부조직법에 의거하여 국영해운기업으로 출범, 60년대 후반 민영화가 된 이후에도 수많은 해운인재를 배출한, 한 마디로 한국 외항해운계 인재산실이 바로 해공이었던 것이다. 우선 50-60년대 한국해양대학 졸업생 중 1등부터 15등까지가 해공 해기사로 입사, 이후 육상근무 전환 등을 통해 해운 인재 산실의 주역이 되었다.
따라서 해양대 1기부터 10기 까지 선배기수들 중 상당수가 해공 출신으로 이들 중 후일 해운기업 중역 또는 CEO로 활약했던 해운인들이 적지 않은 편이다. 대표적인 예로 박현규 해사문제연구소 이사장과 KCTC 신태범 회장이다. 두 분 모두 현역 해운 경영인이기도 하다.
박 이사장은 해공의 초대 노조위원장을 역임했고 신 회장은 당시 해공의 핵심 보직인 선원계장과 선원과장을 지냈다. 이즈음 국적선도 적어서 선원이나 해기사로 취업하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 마냥 어려웠었다. 당연히 선원계장이나 선원과장은 요즈음 말로 하자면 꽃보직이었다.
하지만 신태범 회장은 부정과 타협하지 않은 공정 인사로 유명했다. 그리고 이 같은 기조는 신 회장이 고려해운 임원(상무)으로 변신한 뒤 그대로 시행, 오늘날 고려해운이 성장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또 동남아해운 부사장으로 은퇴한 박재혁 부사장 역시 해공 출신으로 동 사 기관장을 거쳐 해사본부장, 해사담당이사와 상무, 전무 그리고 부사장을 역임한 바 있는 해공이 배출한 유능한 해운 경영인의 한 분이었다.
차터링 업체 동방해운 창업자였던 조원석 사장 역시 해공 기획관리실장과 영업담당 상무, 전무를 역임한 해공맨이었다. 한국선무의 박종규 사장 역시 해공 인사과장을 역임한 뒤 코리아라인 전무를 지낸 바 있다.
김성응 전 FEFC 한국 대표도 해공이 배출한 유능하고 인품 좋은 해운 경영인 중 한 분이었다. 김 대표는 해공 런던 주재원과 범양전용선 이사를 거쳐 구주 및 호주 그리고 북미 운임 동맹 한국사무국 대표를 맡은 바 있었다.
지금까지 언급한 해운인들은 모두 해양대 출신으로 박현규 이사장(1기), 신태범 회장과 박재혁 부사장은 2기이고, 조원석 사장(5기), 박종규 사장(6기), 김성응 대표(8기)이다.
그리고 해공에서 오랜 기간 근무했던 해운 경영인으로 대한해운 전무와 진양해운 부사장 경력의 김지수 부사장이 있다. 김 부사장은 해공 영업부장과 서울사무소장, 그리고 상무이사였고 기획실 부장으로 근무할 시 필자가 자주 뵌 분이기도 하다. 또 영창해운 사장을 역임한 이영욱 사장 역시 해공 운항과장, SF 주재원 서울사무소장, 정기선 영업부장, 상무이사 겸 런던지점장을 지낸 해공이 배출한 분으로 영창해운 사장 시절 필자와 인터뷰 등으로 돈독한 친분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 두 분은 모두 서울대 출신으로 70년대 해공의 주요 간부 및 임원진 구성에 있어 해양대와 서울대 출신이 양대 산맥을 이룬 바 있었다. 또 다른 서울대 출신으로 성함은 기억나지 않지만 영업 담당이사 정 이사가 있었다. 그 밖의 서울대 출신 다수는 이름이 기억 나지 않는다.
해공의 한국 해운계 인재 산실 역할은 70년대 말 윤석민 서주산업 회장이 인수, 회사명을 대한선주로 바꾼 후 실질적으로는 중단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해운계에서 전통적 해운인으로 성장한 정통파 해운인보다 제조업체 서주산업의 고위 간부 및 임원들을 해공에 투입, 정통파 해운인들의 맥을 활발히 이어나가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비해운적이자 정치적 시각의 해운 경영이 결국 해공을 몰락의 길로 내 몬 주요인이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