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국장이 발행인 사장과 밀당 끝에 추종 기자들과 함께 동반 사직서를 제출한 날은 모든 직원들이 퇴근한 후인 토요일 늦은 오후였다. 오전부터 두 사람은 의견을 조율했으나 끝내 실패한 결과였다.
이 때 필자는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회사 L차장(사장 6촌 동생)이 집으로 찾아왔다. 사장 차를 타고 와서 대충 상황을 얘기한 뒤 필자를 재촉, 함께 회사로 갔다. 그리고 초조하게 필자를 기다리던 발행인을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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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국장이 한 주 업무가 종결된 토요일에 사표를 낸 배경은 발행인이 틀림없이 항복, 자신의 요구가 관철될 것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만약 원고 마감일인 목요일 정도 거사를 감행했다면 필자로서도 어쩔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내몰렸을 것이다.
하지만 C국장은 발행인이 백기를 들 것이고 어차피 자신이 다음 호를 책임지고 편집을 마쳐야 한다고 판단, 토요일을 쿠데타 거사일로 잡았다고 보였다. 하지만 이 같은 안이한 예측이 필자의 쿠데타 제압의 또 하나 계기가 되었다. 필자를 본 발행인은 이 상황에서 주간지 발간이 가능하겠는가 여부를 물어왔다. 차를 타고 오면서 머릿속에 그려 둔 계획이 있었기에 주저 없이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순간 발행인과 L차장의 얼굴은 그야말로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필자는 그 자리에서 두 가지 선결 사항을 요청했다. 하나는 월요일 조간에 기자 채용 광고를 게재하되 연락처(전화) 명기 이력서 제출을 표기하도록 강조했다. 도착하는 이력서 제출자에 바로 연락, 최대한 신규 채용 시일을 당기겠다는 복안이었다.
그리고 영업 및 총무부 인력들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권한을 요구했다. 이는 입출항 스케줄 수집 및 작성 업무 교육 및 시행을 위해서 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동안 수집해 왔던 각종 자료들을 챙겨와 밤늦도록 기획 기사를 작성했다. 그리고 다음 날 일요일 하루 종일 늦게까지 원고를 작성, 최대한 많은 기사 분량을 확보해 두었다.
월요일 출근 직후 오전에는 비 편집부 직원들 중 가능성이 있는 여직원들을 모아 스케줄 수집 및 작성 요령을 교육시켰다. 오후 모두 출동시키면서 필자 역시 사전에 전화로 연락, 필자 담당 스케줄 수집에 시간을 최대한 단축시켰다.
화요일 오전에는 스케줄 작성 교육 및 상황을 점검한 뒤 오후에는 번역할 만한 영문 및 일어 자료(외국 해운 기사)들을 가지고 해운 업계로 달려 나갔다. 이 일은 수요일도 하루 종일 진행했다.
우선 일본해사신문 및 월간 해운지 기사 중 번역할 만한 기사를 가지고 당시 한국해상운송주선업협회 한동환 전무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기사를 보면서 내용을 얘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한동환 전무가 읽어주는 내용을 받아 적었다.
영어로 된 자료 중 주간 페어플레이지가 가장 번역하기 까다로운 편이었다. 반면 일본에서 영문으로 발간되는 일간 ‘Shipping & Trade’ 자료는 비교적 번역이 쉬웠다. 그래서 페어플레이지는 당시 해운업계에서 영어 잘하기로 소문난 극동선박의 구 차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한 전무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그 자리에서 말로 번역한 내용을 받아 적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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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기사 면은 활판 인쇄, 광고 면은 오프셋 인쇄로 제작했다. 기사 교정은 금요일 천풍인쇄소에 가서 OK를 놓았던 것을 감안, 토·일요일 집에서 작성한 기획 기사는 월요일에 모두 천풍으로 보내 미리 교정을 완료해 놓았다. 그리고 목요일 하루 종일 외신 기사를 만들었다.
단순히 번역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국적 상황과 비교해 가면서 기사의 양을 대폭 증가시켰다. 이렇게 해서 그 주 기사면은 다 채웠다. 같은 방식으로 그 다음 주도 무난히 넘겼다. 그리고 신입기자들 4-5명을 새로이 채용했다.
이 과정에서 취재 기자로 입사한 인물이 손진홍 기자였다. 고려대 신방과 출신의 손 기자는 어떤 국책 연구소에서 근무하다 해운기자로 이직했는데, 자료, 특히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기사 작성에 능숙한 편이었다.
한 1년 정도 근무하다 퇴직했는데 80년대 초 국내에서 두 번째 해운 주간지 쉬퍼스저널이 창간되었을 때 편집 차장으로 실질적인 편집국장 역할을 감당한 바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취재 및 외신 기자들 중 이화여대 사회학과 출신의 여명자 기자가 기억나고 나머지 기자들 이름은 모두 잊어버렸다.
이렇게 한국 최초의 해운 주간지 발간 중단 위기를 극복하면서 필자는 개인적으로 건강에 문제가 생겨났다. 그렇지 않아도 약했던 신장(콩팥)의 기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반면 발행인의 필자에 대한 신뢰는 그야말로 절대적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이 당시 필자의 직위는 편집차장이었다. 그리고 이후 매년 한 계단 씩 승진, 83년에 상무이사, 그리고 두 단계 월반, 86년에는 대표이사 사장(발행인 겸 편집인)의 위치까지 올랐다.
하지만 회사를 위기에서 구한 70년대 말에는 편집국장으로 발행인의 고교 동기동창인 J국장이 부임해 왔다. 필자로서는 약간은 맥 빠진 기분이었다.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편집국장을 맡기기에는 너무나 빠르다는 발행인의 인사를 받아들였다.
그 동안 제반 사정을 발행인으로 부터 사전에 청취한 J국장은 너무나 큰 비중의 인물로 성장한 필자를 견제하고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가장 먼저 시행한 조치가 주요 해운회사 최고 경영자와의 인터뷰였다.
경영관련 월간지 편집국장으로 근무하다 해운 주간지 편집국장으로 옮겨 온 J국장은 해운회사 최고 경영자들에 경영관을 취재·연재하겠다는 의욕 넘치는 기획이었다. 그리고 인터뷰 할 주요 선사 사장을 선정 및 약속 시간 확정을 필자에게 감당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필자는 주요 선사 사장 서너 명과 연락, 인터뷰 일시를 확정 보고했다. 당시 한국 외항해운계는 대리점선사 등이 주도하고 있었다. 대리점 선사로 가장 오래되었고 원양 취항 외국선사 유치 규모가 가장 방대한 선사는 에버렛기선이었다. 그리고 CEO는 이동혁 총 지배인(사장)으로 필자와도 각별한 사이이기도 했다.
인터뷰가 약속된 날 J국장을 모시고 이동혁 사장실로 찾아가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이 사장에 해운회사 경영에 대해 J국장이 질문하고 답변을 들었다. 그런데 이 사장 입에서 나오는 말의 대부분은 영어로 된 해운용어였다. J국장은 한 마디로 알아듣지 못하고 돌아왔고 그 다음 부터는 두 번 다시 인터뷰 하자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J국장은 외신기자들의 번역 및 수정 지시까지 필자에 일임했다. 그래서 자신은 해운 주간지에 일반 경영 이론을 연재하는 것으로 간신히 자신의 존재감을 유지했다.
- 이종옥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