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운 칼럼] 해운 주간지 발간 중단 위기 극복기(1)

취재부
2017-11-14
70년대 초 한국 최초의 해운 주간지 공채 신입기자로 입사했을 때 전체 임직원 8명 중 편집국 소속원이 4명이었다. 이 중 기자가 3명, 편집국장(편집고문) 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필자의 직속 상사인 C국장은 일제 강점기 학창시절을 보내 일어에 능통했다. 또 미국에서 기자 생활을 했을 정도로 영어 또한 탁월한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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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TC 육군 중위로 전역 직후 회사 생활, 그것도 선후배간 위계질서가 그 어떤 업종보다 타이트한 기자 직종을 선택한 이상 데스크(편집국장)의 권위는 절대적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C국장이 지시한 어떠한 취재 및 원고 작성 지시를 한 번도 어겨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우선 30대 후반의 발행인(사장)에 대한 50대 중반의 C국장의 저자세였다. 능력이 있는 만큼 조금은 당당해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속된 말로 설설 기는 자세로 일관하는 모습이 그다지 보기 좋지 않았다. 얼마 후 한 가지 요인은 파악해냈다. C국장이 미국 각종 잡지 등에 게재된 만화, 그 중에서도 고급스러운 유머가 담긴 만화를 번역, 이를 국내 잡지사 등에 원고료를 받고 전해주고 있는데 이를 발행인이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풍족하지 못한 급여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다. 그렇게 상당 수준의 부수입을 지니고 있던 C국장은 그야말로 왕소금의 구두쇠였다. 기껏 3명에 불과한 부하 기자들과 점심 식사를 할 때면 미국식을 내세워 더치 플레이를 강조했다. 이는 장교생활을 해 본 필자로서는 상관이 부하와 식사하면서 더치플레이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납득할 수 없었다.
부사관(오늘날 준사관)이나 후배 장교들과 식사하면 당연히 상사가 비용을 부담함이 상식이었지만 가족을 거느린 C국장의 처지도 이해 못할 바 아니어서 드러내 놓고 어떤 불만도 제기한 바 없었다. 그리고 필자 결혼식 때 축의금을 내지 않았던 점도 오죽했으면 그랬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이해하려 했다.
이 같은 C국장의 처신이 필자로 하여금 발행인에 대한 당당한 자세를 가져오게 만든 또 하나 요인이 되었다. 특히 사주인 발행인 L사장은 필자만 몰래 불러내어 차도 한 잔 하고 간식(주로 제과점 빵)도 함께 먹는 등 남다른 애정을 표시하곤 했다.
L사장은 어떤 취재 지시도 다 수행할 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할 말은 하는 필자의 젊은 패기를 좋아했다. 그러면서 조금만 더 고생하면 걸맞은 대우를 하겠다는 사탕발림도 잊지 않았다. 자연히 C국장도 발행인 L사장이 유난스럽게 필자를 챙긴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이때부터 C국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필자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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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국장이 가장 먼저 시도한 방법은 외신기자들을 자신의 심복들로 채우는 일이었다. 특히 필자가 입사 5년 만에 팀장(과장)이라는 직위를 부여받자 취재팀장이라는 직위로 기자 관장 범위를 제한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2~3명 정도의 취재기자만 컨트롤하고 역시 2~3명에 이르는 번역(영어, 일어) 업무의 외신기자들을 필자를 거치지 않고 자신에게 기사를 제출하게 만들었다. 번역 지시(외국 신문∙잡지)도 물론 C국장이 필자를 거치지 않고 직접 지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국장이 직접 채용한 외신기자들은 필자에게 스스로 다가와 상사로서의 예우를 갖추기 시작했다. 해운 용어 때문이었다. 외국 기사에 난무하는 해운 용어를 설명해 줄 사람은 필자뿐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컨테이너운송 시스템 그 중에서도 한국적 특성에 대해서는 필자에게 여러 차례 설명을 들어 이해가 되어야 번역을 할 수 있었다.
또 하나 외신기자라도 선박 입출항 스케줄 체크와 작성, 그리고 교정 업무는 수행해야 했는데 이 분야에서도 취재팀장인 필자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5년 여 동안 국내 유일의 해운 취재기자로서 쌓아놓은 해운계 인사들과의 인맥으로 인해 어떤 해운회사에도 교분이 두터운 해운인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특히 스케줄 체크를 위해 매주 월요일 오전이면 취재기자, 외신기자 가릴 것 없이 모두 사전에 분담된 해운 회사로 자료 수집차 출동해야 했다.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전산은 물론이고 Fax도 없던 시절이어서 직접 발로 뛰어 수집해 오고 작성해 와야 했다. 그리고 이 일은 스케줄 주간지의 특성상 바로 광고 업무이기도 해서 발행인의 최대 관심사였다. 이런 점이 감안되어 발행인은 C국장의 필자 견제를 불편해 하면서 기회만 있으면 필자 챙기기에 나섰다. C국장이 없는 틈을 타서 필자를 사장실로 호출, 바둑을 두거나 대화하기를 즐겨했다. 하지만 필자는 C국장에게 상사에 대한 대접을 한 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C국장이 부재 시 발행인 L사장에게 불려 갔다 온 경우 차후 반드시 보고했다. 그리고 발행인과 무슨 일을 했는지 설명했다. 물론 대화의 내용을 소상하게 알리지는 않았다. 그것은 C국장의 상사이기도 한 L사장에 대한 당연한 처신이기도 했다. 그래서 C국장은 드러내놓고 필자에게 나쁜 감정을 한 번도 토로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70년대 말 경 C국장이 자신의 급여 인상을 L사장에게 건의했다가 거절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일을 필자도 알게 된 배경은 C국장이 자신을 포함한 편집부원 급여 조정을 L사장에게 강력하게 건의하면서 기자들에게도 생색을 냈기 때문이다. 너무나 낮은 급여 수준에 대한 당연한 요구이기도 했다. 하지만 거절을 당하자 자존심이 상한 C국장은 몇 달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마침내 해운 주간지 발간 중단을 위해 거사를 행하게 되었다.
우선 필자는 회유하기 어렵다고 판단, 사전에 무슨 이유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취재 기자 2명을 사직시켰다. 그래서 새로운 신입 여기자 한 명을 채용한 시점이었다. 그리고 외신 기자 3명은 자신과 동반 사직서를 L사장에게 제출했다.
아무리 5년의 경력기자라도 갓 입사한 여기자 한 명을 데리고는 해운 주간지 발간을 지속할 수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기사 작성 뿐 아니라 스케줄 수집과 작성, 그리고 교정 업무 등 전체 편집 업무의 상황을 감안, 절대 불가능하다고 C국장은 판단했다. (다음 회에 계속)

- 이종옥 발행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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