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외항해운업계도 광복 이후 72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다보니 1세대 해운인은 왕상은 협성∙범주해운 창업자 같은 특별히 장수하고 있는 해운 경영인 외 모두 타계, 우리 곁을 떠난 상태이다. 그리고 이들 1세대 해운인들이 왕성한 현역 활동을 하던 70년대 상황을 되돌아보면 하고 싶은 말이 적지 않다.
1세대 해운인들의 노년과 말년을 지켜본 해운기자로서 잘 늙어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절감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청∙장년 시절 유지했던 인간적∙인격적 면모를 지속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뜻이다.
사람은 누구나 연령이 높아지면 육체적이나 건강상 어려움을 겪게 된다. 해운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 중에서 기억력 감퇴는 어쩔 수 없는 현상 중 하나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약속이나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기록으로 남겨서 자신의 기억력 감소를 대비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단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인간관계를 손상시키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얼마 전 오랜 기간 참으로 돈독한 인간관계를 유지해 왔던 어떤 해운 경영인으로부터 이상한 전화를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본지 발행 주간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바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참으로 따뜻하고 인간적인 해운 경영인이었는데 이치에 전혀 맞지 않는 논리를 전개, 아무리 설명해도 납득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섭섭하다는 의사를 내비치기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몇 개월 전 자신이 한 말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음을 감지하고는 더 이상의 대화가 의미가 없을 것으로 판단, 전화를 멈추었다.
그리고 그 해운인과는 인간관계가 단절되어 버렸다. 나이가 들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동안 그 해운인과의 인간관계가 너무나 바람직했기에 아쉬움이 많았다. 이처럼 나이가 팔순을 넘어가면서 자신이 한 약속은 잊어버리고 오히려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 그동안의 인간관계를 훼손시키는 사례는 더러 경험한 바 있었다.
지금은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조찬강연회나 재테크 강연회 등은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어떤 해운인도 마찬가지이다. 20세기 그 해운인이 몸담고 있던 해운 기업의 창업자 양재원 회장과 각별한 친분 관계를 유지한 바 있었다. 이 당시 고위 임원이었던 그 분은 필자를 그야말로 좋아해서 회사 내 온갖 은밀한 사연까지 다 들려주는 사이였다. 그런데 양 회장이 타계, 소속을 옮긴 후 은퇴 직전부터 사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오래전 과거 자신이 보살펴주었던 해운인이 설립한 해운 회사에 회장으로 취임했다기에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했더니 기억이 없다는 황당한 대답을 듣게 되었다. 물론 십 수 년의 친분이 기억나지 않을 수 있다. 기억력 감퇴라는 노쇠한 나이에 따른 부작용일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이 있은 직후 어떤 해운 경영인으로 부터 그 해운인이 재테크 강연회에 참석, 열심히 메모하는 모습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기억 감소가 아닌, 의도적으로 모른다고 회피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인간관계의 척도를 자신에게 무언가 유익을 가져올 수 있느냐에 따라 친분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노련함이라기보다 나이 들어 인격적 측면을 도외시한 노탐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과거 자신의 사주인 양재원 회장 생존시와 양 회장이 타계한 지금과는 자신에게 그다지 유익함을 줄 수 없는 인간관계는 외면하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처럼 나이가 들어가면서 각박해져 욕심이 더욱 깊어지는 해운인이 더러 있다. 인생의 황혼기를 타인에 배려하고 선한 관계로 마무리 하겠다는 생각보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재산을 늘리고 쾌락을 즐기고 살다가 가겠다는 노욕이 충만해진 경우이다.
그래서 해운인이든 누구든 나이가 지긋해지면 잘 늙어야 한다는 말이 적용될 수밖에 없다. 노탐을 버리고 타인에 좀 더 양보하고 자신이 가진 물질적∙정신적 자산을 나누면서 생의 마지막을 장식하겠다는 인격적 발상을 하는 지혜를 보이지 못함은 정말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이 들어 비록 육체는 쇠약해져가지만 타인을 챙기는 마음만은 더욱 충만, 주변의 해운인들이나 친인척으로 부터 정말 인격적으로 잘 늙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해운인이 많이 나타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