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운 칼럼] 사라진 해운기업들이 준 교훈(1)

취재부
2018-07-03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말은 외항해운 분야에서도 예외 없이 입증되었음이 46년 동안 우리 해운업계를 지켜본 필자의 결론이다. 특히 해운기업의 흥망성쇠 역사에서 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국 해운을 대표했던 대형 및 중견 선박운항자들의 도산 역사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음이 사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후대 해운 경영인들에게 창고가 될 만한 사라진 해운기업들에 대한 언급을 하고자 한다. 그 중에서도 필자만이 지니고 있는 또한 직접 경험했던 해운기업들에 관해 서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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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에 국영 해운기업으로 설립되었다가 60년대 말 민간인에 불하되었고 70년대 말 대주주가 바뀌면서 회사 이름이 사라진 대한해운공사(해공)에 관한 사연은 오늘의 우리 해운계로서도 잊지 말아야 할 교훈들이 한, 둘이 아니다.
해공에 관해서는 기회가 있을 때 마다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지속해 왔음이 사실이다. 하지만 해공이 왜 고전을 면치 못해 회사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오늘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탄탄한 영업망을 구축했던 해공의 영업상, 즉 카고 세일즈의 취약성에 대해 필자가 수없이 많이 취재했던 기록과 기억을 중심으로 회고해 보기로 하자.
20세기 유일한 원양정기항로 국적선사였던 해공은 웨이버라는 크나큰 카고세일즈상 특혜를 누렸다. 웨이버는 개도국 선사들에 허용한 자국선 우선 적취제도였다. 즉 해공의 선박은 그 어떤 국외 선사보다 한국에서의 우선 적취를 보장해 주었다. 웨이버를 적용한 것이다.
즉 외국선사들이 한국항에서 화물을 적취하려면 제일 먼저 해공의 선박이 접안해 있지 않다는 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했다. 이것이 웨이버로서 한국선주협회 사무국이 이 업무를 대행했다.
하지만 해공의 웨이버제도 적용에는 근원적으로 취약성이 존재했다. 첫째는 노선이 한국-북미 및 한국-동남아 노선에 국한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재래선 화물에 한정되었다. 해공이 70년대 말까지 투입선의 풀 컨테이너화를 실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운항선 중·대형 풀 컨선이 한 척도 없어 웨이버 적용이 재래 화물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70년대 말 해공이 홍콩선사 OOCL로부터 중고 풀 컨선을 도입, 북미항로를 풀 컨화 하고 또 연이어 신조 풀 컨선을 건조하여 유럽 및 북미항로에 투입하면서 영업실적 부진과 인·아웃바운드 불균형으로 치명타를 입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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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해공의 숙원사업이자 한국 정기선 해운의 과제였다. 한국 최고·최대 선사 해공이 과감하게 대형 풀 컨선을 확보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카고세일즈가 이를 뒷받침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원양항로에서 재래선 화물만 적취했지 컨테이너 화물은 다루어보지 못한데 따른 갖가지 시행착오를 노정시켰다. 
두 가지 큰 과오를 카고세일즈상 저질렀다. 첫째로 고객인 하주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해 수익성이 높은 고가의 화물 대신 운임이 낮은 조약한 화물들을 주로 집화한 것이다. 특히 인 바운드 화물이 그러했는데, 예를 들면 파지나 고철 등이었다.
다시 말해 웨이버에 안주, 한국 시장에서는 물론이고 해외 시장에서 완벽한 서비스 네트워크, 그 중에서도 영업망 구축을 소홀히 했다. 재래선과 달리 풀 컨선 운항에 있어 중간 기항지에서의 카고 실적은 그야말로 수익성을 좌우한다. 그러나 해공은 초기 이 분야에서 형편없는 영업 실적을 구현했다.
두 번째는 그나마 아웃바운드 화물 적취율은 60-70%를 유지했으나 인 바운드 화물 적취율은 완전 바닥이었다. 당연히 인·아웃바운드 평균 적취율은 형편없이 추락했다. 이로써 또 한 가지 심각한 시행착오를 경험했다. 바로 Inventory Control의 실패였다.
이로 인해 비싼 임대료를 주고 확보한 빈 컨테이너 활용에 결정적 제한을 초래하고 말았다. 아웃바운드 화물을 싣고 간 컨테이너에 인 바운드 화물을 담아서 돌아와야 최상인데, 북미 지역에 빈 컨테이너가 잔뜩 쌓이게 된 것이다.
결국 화물을 적취하지 못한 나중에는 화물이 없는 빈 컨테이너를 싣고 한국으로 들어오는 풀 컨선들이 속출하고 말았고 수익성은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으로 이에 따른 적자를 견디지 못했다. 문제는 해공의 이 같은 잘못을 또 다른 국적선사들도 유사하게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해공은 풀 컨선 운항의 최초의 국적선사여서 그 같은 시행착오를 범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후 조양상선이나 한라해운도 원양항로 풀 컨선 운항을 하면서 마찬가지의 시행착오로 결국 회사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그 중에서도 한라해운은 그야말로 해공의 판박이였다. 인·아웃바운드 수급 불균형과 이에 따른 인벤토리 컨트롤 실패로 도산하고 말았다. 한라그룹의 계열 해운회사로 호기롭게 출범했으나 선배격인 해공의 실수를 참고, 미리 대비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외항해운 기업사에서는 과거 잘못된 영업 및 운항 업무를 그대로 답습한 사례가 적지 않다. 단적으로 말해서 해운 역사에 대한 관심이나 의식이 철저히 부족했다는 의미이다.
대형 운항사가 넘어지면 자신의 회사가 아니더라도 한국의 해운인이라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실패의 원인에 대해 점검해 보고 자신들은 그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관련 자료를 챙기는 지혜가 요구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 해운 기업주들은 그 같은 역사의식을 소홀히 함으로써 앞서 실패한 국적선사들을 참고해서 자신들의 실수를 줄이려는 노력을 소홀히 함으로써 동일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된 셈이다.

- 이종옥 발행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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