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운 칼럼] 잊을 수 없는 ‘대한해운공사’ (1)

취재부
2020-05-26

반세기에 가까운 기나긴 세월 동안 한국 해운계에 몸담으면서 수도 없이 많은 해운 회사들을 취재했다. 그 중에서도 일선 기자 시절 매일 출입하다시피 한 해운기업이 있다.

70년대 한국 해운을 대표했던 국내 1위의 외항해운기업, 국내 유일의 원양 정기항로 취항선사였던 대한해운공사(약칭 해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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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회사 규모가 커서 취재 꺼리가 많아서 만이 아니었다. 70년대 해공에는 주요한 사장이나 임직원 대다수가 능력과 인품을 갖춘 해운인들이어서 해운기자 입장에서도 업무적으로는 물론이고 말이 통하는 인간적 소통에 있어서도 해공 근무 해운인들은 정이 가고 신뢰를 가질 수 있는 분들이어서 만남 자체가 즐거웠다.

해공은 30년 이상 한국 해운을 이끌어 온 운항업체로서 상당수의 해운 경영인을 배출한 해운기업이기도 했다. 당연히 한국 외항해운 역사적 측면에서 절대 소홀히 다룰 수 없는 중요한 해운기업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1980년 대주주의 변경으로 회사명이 대한선주로 바뀌어 해운공사라는 명칭은 정확히 30년간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기간 해공을 취재했던 해운기자는 필자가 유일하다. 현재 해운 전문지에 종사하고 있는 대다수의 인물들은 80년대 중반 필자 손에 의해 신입 해운 기자로 선발되어 훈련받았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유로 인해 해운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해운공사에 대해 심도 있는 기록을 남길 만한 해운 매체 종사자 또한 필자 외에 누구도 없다. 실제로 해공에 관한 자료 역시 필자가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이런 제반 사항을 감안, 해공의 역사와 더불어 해공 취재 에피소드 등을 몇 회에 걸쳐 연재, 해공 기록화의 의미 있는 자료가 되었으면 한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관장하던 조선우선이라는 해운회사가 존재했었다. 광복을 맞은 1945년 8월 시점에서 조선우선의 상당수 선박들은 일본항에 기항해 있었다. 한일항로에 이모저모로 취항하다보니 이루어진 현상이었다.

그리고 이들 외항선 상당수는 일본 현지에서 발이 묶였다. 이에 1948년 정부 수립 후 이들 외항선 상당수를 일본 당국으로부터 회수한 바 있다.

이 시기 조선우선 소속이었던 외항선에 광복 당시 한국 선주 소속 대형선을 보태어 1950년 1월 1일부로 정부 조직법에 의거한 국영해운 기업으로 대한해운공사가 발족했다. 그리고 그 해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해공 선박들은 징발되어 주로 국내 연안간 운송에 투입되었다. 선대 규모나 선령 측면에서 외항 항로에는 취항시키기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공은 휴전 후 1955년 9월이 되어서야 동남아 정기항로를 개설, 외항항로 진출의 임무를 맡기 시작했다. 한국 전쟁의 참화로 최빈국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이어서 동남아 국가들이 한국에 제공하는 원자재 수송에 종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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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항해운업이 지닌 특징 중 하나가 영업의 유연성인데 해공은 국영기업체로서 여러 측면에서 한계를 느꼈다. 이에 하나의 대안은 주식회사 형태의 운송기업으로 탈바꿈하는 것이었다. 국영 기업이나 주식회사라는 성격을 부여한 것이다. 이는 1957년 12월 30일부로 단행되었다.

그리고 5.16 군사정변 이후 군사 정부의 경제 성장 정책에 발맞추어 해공 역시 1962년 10월 그동안의 숙원 사업이었던 원양 정기항로 개설에 나섰다. 극동-북미 태평양 항로(미국 서안 기항) 개설에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5년 후인 1967년 7월 극동-뉴욕항로(미국 동안 기항)를 개설, 국내 유일의 원양 정기 항로 취항 국적선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 시기를 즈음해서 해공에는 대내외적으로 큰 변화가 몰려왔다. 우선 이맹기 해운참모총장이 전역하면서 해공의 CEO로 부임한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해공이 보여 왔던 해운회사 답지 않았던 모습을 개선, 영업실적을 제고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군사정부가 민간정부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집권 여당인 공화당이 창당되어 선거를 대비한 엄청난 정치 자금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때 공화당의 자금을 책임지던 재정위원장이 쌍용그룹 설립자인 김성곤 회장이었다. 김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해운공사의 민간 불하를 통해 자금 사정을 해결하자고 해서 허락을 받았다.

이런 과정에서 언론이 해공의 민간 불하 예정을 보도하자 해공에서는 크나큰 동요가 일어났다. 급기야 이맹기 사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가 간곡하게 설득한 끝에 해공의 국영기업 존속을 다짐받았다.

하지만 김성곤 회장은 정권 차원에서 해공의 민간 불하 필요성을 밀어붙여 결국 해운공사는 1968년 11월 11일 완전히 민영화되었다. 한양대학교 설립자였던 김연준 한양대 총장이 인수한 것이다. 그리고 김 총장은 언론인이자 국회의원과 부흥부 장관을 지낸 주요한 씨를 해공의 CEO로 발탁했다.

한편 해공 사장직을 사임한 이맹기 사장은 곧바로 코리아라인(대한해운)을 창업, 오너의 길을 걷게 된 바 있다.


- 이종옥 발행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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