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지 존재감이 없는 군소 포워더를 예외로 하고 그 어떤 해운기업이든 CEO를 지낸 해운인이라면 자신의 해운계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기려 함이 정상이다.
대형 해운기업의 창업자나 CEO가 아니더라도 30-40년 이상 해운계에 몸담았던 해운인이라면 자신이 걸어온 해운인생에 대해 무언가 남기려는 사고를 지녀야 마땅하다.
그런데 우리 해운계에는 그와 반대되는 사조의 경향이 존재해왔다. 광복 후 75년의 역사가 흐른 만큼 외항해운의 역사 또한 그 세월만큼 쌓여왔다. 그리고 광복 후 해운계에 종사했던 1세대 해운인들 대다수는 이미 타계한 상태이다.
이들 1세대 해운인들 중 한국 해운계에 나름대로 족적을 남긴 해운인들조차 별다른 기록 한 줄 남기지 않고 이미 타계해 버렸다. 문제는 해운인 기록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는 해운 매체들이 70년대 이후 창간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상당수 1세대 해운인들은 해운 매체에 등장조차 하지 못한 채, 그래서 변변한 기록조차 남기지 않은 채 타계 또는 은퇴하고 말았다. 물론 찾아보면 어느 한 구석에 기록을 남긴 흔적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20세기에는 한국 해운계 역시 전산화 작업이 미미했던 터라 해운인 기록 자체가 풍성하지 못했다. 특히 일간지(대중 및 경제지)에서 한국 해운계 인사에 대해 언급된 바도 없어 이제는 20세기에 활동했던 1세대 해운인들의 기록은 어디에서나 찾기 힘든 상태이다.
여기에는 한국 해운 기업의 특성과도 상관관계가 많아, 우선 재벌기업군 같은 대형 기업의 계열 해운 회사가 드물었다는 사실이다. 그 좋은 예가 한국 최대의 그룹인 삼성그룹에는 해운 회사가 존재하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이다.
또 하나 대다수 1세대 해운인들이 사회 활동을 그다지 활발하게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정계는 물론이고 재계나 비해운계에서 일반인들이 기억할만한 족적을 남기지 못해 기록 자체가 존재할 여건이 성숙되지 못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결국 1세대 해운인 스스로 기록으로 남기려는 노력이 가장 효과적이지만 이 또한 소홀히 해 왔음이 부인 못할 사실이다. 특히 조선 왕조 시대의 관직에 대한 선호 사상이 무언가 벼슬을 하지 않은 인물은 기록화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고와 연결될 수 있다.
이런 풍조의 연관성으로 1세대 해운인들 다수는 자신의 해운계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에 의해 기록으로 남겨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곧바로 한국 해운계의 기록 문화 소홀로 이어져 오늘에 까지 이르렀다.
특히 아쉬운 바는 선박운항업계에 종사했던 1세대 해운인 대부분이 기록으로 이어지는 가장 확실한 근거인 30년 이상의 장수 해운기업에 몸담지 못했다는 점이다. 짧게는 몇 년, 길어야 10년 이내의 수명을 지녔던 운항업체에 몸담다보니 기록 보존의 기회조차 제대로 갖지 못하고 말았다.
여기에다 또 하나 잘못된 풍조가 자신의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자기 과시의 일종으로 오해했다는 의식이다. 여기에 더해 성공한 해운인 아니면 기록으로 남길 수 없다는 개념이 지배적이었다.
운항업의 경우, 성공한 해운 기업인의 족적보다 실패한 창업자나 CEO들의 기록이 더욱 중요함을 간과해 버렸다. 후대 해운인들의 시행착오를 방지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실패한 해운 경영인들의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이런 실패한 경험이 활자화로 남겨져 있지 않다보니 한국 최대의 해운 기업이었던 대한해운공사의 전철을 한진해운이나 한라해운 등 수많은 해운 기업들이 답습하고 말았다고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한국 해운계의 기록 문화 부재가 가져온 비극 중의 하나이다. 다행히 21세기에는 전산화의 진전으로 상당수의 해운 매체들이 인터넷 해운 전문지까지 겸하고 있어 해운인의 기록화는 자동적으로 달성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양대 등 해양계 교육 기관에서 지금부터라도 우리 1세대 해운인들의 기록을 수집하고 축적하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하겠다.
그다지 존재감이 없는 군소 포워더를 예외로 하고 그 어떤 해운기업이든 CEO를 지낸 해운인이라면 자신의 해운계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기려 함이 정상이다.
대형 해운기업의 창업자나 CEO가 아니더라도 30-40년 이상 해운계에 몸담았던 해운인이라면 자신이 걸어온 해운인생에 대해 무언가 남기려는 사고를 지녀야 마땅하다.
그런데 우리 해운계에는 그와 반대되는 사조의 경향이 존재해왔다. 광복 후 75년의 역사가 흐른 만큼 외항해운의 역사 또한 그 세월만큼 쌓여왔다. 그리고 광복 후 해운계에 종사했던 1세대 해운인들 대다수는 이미 타계한 상태이다.
이들 1세대 해운인들 중 한국 해운계에 나름대로 족적을 남긴 해운인들조차 별다른 기록 한 줄 남기지 않고 이미 타계해 버렸다. 문제는 해운인 기록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는 해운 매체들이 70년대 이후 창간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상당수 1세대 해운인들은 해운 매체에 등장조차 하지 못한 채, 그래서 변변한 기록조차 남기지 않은 채 타계 또는 은퇴하고 말았다. 물론 찾아보면 어느 한 구석에 기록을 남긴 흔적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20세기에는 한국 해운계 역시 전산화 작업이 미미했던 터라 해운인 기록 자체가 풍성하지 못했다. 특히 일간지(대중 및 경제지)에서 한국 해운계 인사에 대해 언급된 바도 없어 이제는 20세기에 활동했던 1세대 해운인들의 기록은 어디에서나 찾기 힘든 상태이다.
여기에는 한국 해운 기업의 특성과도 상관관계가 많아, 우선 재벌기업군 같은 대형 기업의 계열 해운 회사가 드물었다는 사실이다. 그 좋은 예가 한국 최대의 그룹인 삼성그룹에는 해운 회사가 존재하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이다.
또 하나 대다수 1세대 해운인들이 사회 활동을 그다지 활발하게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정계는 물론이고 재계나 비해운계에서 일반인들이 기억할만한 족적을 남기지 못해 기록 자체가 존재할 여건이 성숙되지 못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결국 1세대 해운인 스스로 기록으로 남기려는 노력이 가장 효과적이지만 이 또한 소홀히 해 왔음이 부인 못할 사실이다. 특히 조선 왕조 시대의 관직에 대한 선호 사상이 무언가 벼슬을 하지 않은 인물은 기록화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고와 연결될 수 있다.
이런 풍조의 연관성으로 1세대 해운인들 다수는 자신의 해운계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에 의해 기록으로 남겨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곧바로 한국 해운계의 기록 문화 소홀로 이어져 오늘에 까지 이르렀다.
특히 아쉬운 바는 선박운항업계에 종사했던 1세대 해운인 대부분이 기록으로 이어지는 가장 확실한 근거인 30년 이상의 장수 해운기업에 몸담지 못했다는 점이다. 짧게는 몇 년, 길어야 10년 이내의 수명을 지녔던 운항업체에 몸담다보니 기록 보존의 기회조차 제대로 갖지 못하고 말았다.
여기에다 또 하나 잘못된 풍조가 자신의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자기 과시의 일종으로 오해했다는 의식이다. 여기에 더해 성공한 해운인 아니면 기록으로 남길 수 없다는 개념이 지배적이었다.
운항업의 경우, 성공한 해운 기업인의 족적보다 실패한 창업자나 CEO들의 기록이 더욱 중요함을 간과해 버렸다. 후대 해운인들의 시행착오를 방지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실패한 해운 경영인들의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이런 실패한 경험이 활자화로 남겨져 있지 않다보니 한국 최대의 해운 기업이었던 대한해운공사의 전철을 한진해운이나 한라해운 등 수많은 해운 기업들이 답습하고 말았다고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한국 해운계의 기록 문화 부재가 가져온 비극 중의 하나이다. 다행히 21세기에는 전산화의 진전으로 상당수의 해운 매체들이 인터넷 해운 전문지까지 겸하고 있어 해운인의 기록화는 자동적으로 달성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양대 등 해양계 교육 기관에서 지금부터라도 우리 1세대 해운인들의 기록을 수집하고 축적하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