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7월 15일 필자가 몸담고 있던 해운 주간지 이 모 발행인(사장)의 워커힐 아파트에 간부진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이 사장의 43세 생일을 맞아 해운 주간지에서 타이틀이 있는 모든 임직원들이 저녁을 함께 한 뒤 차를 마시며 회사의 장래에 대한 의견 개진을 하기 위해서였다.
10여 년 이상 국내 유일의 해운 주간지로서 독점적 지위와 편안을 누려왔던 호시절이 가고 경쟁 주간지가 등장함에 따른 일종의 대책 회의 성격도 갖고 있던 회의였다.
1
참석자는 이 사장 외 정 모 편집국장, 편집차장인 필자, 그리고 이 모 총무ᆞ영업 담당 차장, 한 모 경리 담당 과장대리, 김 모 영업담당 주임 등이었다.
우선 80년대 초부터 필자에 의해 원고가 작성되고 있던 ‘해운 용어 해설’ 단행본 발간의 진행 상황에 대해 필자의 설명으로 회의는 진행되어 나갔다. 10월 말까지 단행본을 발간하기로 하고 이에 따른 전사적 지원을 이 사장이 지시했다.
그리고 향후 해운 주간지 발전에 대해 각자 의견 발표를 사장이 요구했으나 아무도 어떤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필자가 나서 출판 분야로의 진출 강화가 가장 효과적인 방향임을 제시했다.
경쟁지에 비해 10여 년의 역사가 쌓여진 자료 등을 기초로 연 1회 정기 발행의 ‘해사 연감’과 영문판 해운 편람인 ‘쉬퍼스 가이드’ 발간을 제시, 2년 이내에 결과물을 해운계에 내놓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이 모든 출판물을 필자 혼자서 저술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해운 용어 해설’은 유가 판매에 진력, 이를 전사적으로 매달려야 함을 강조하는 사장의 지시가 있었다. 그리고 해사연감이나 쉬퍼스가이드의 사전 광고 확보에 총무ᆞ영업부서의 각별한 노력이 요구된다는 사장의 언급으로 회의는 끝났다.
2
당장 눈앞의 과제인 해운 용어 해설 단행본 발간에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원고는 수년 전부터 필자가 틈틈이 작성, 이미 완성된 상태였다. 하지만 기사에서 추출한 형태여서 실제 업계의 현실과는 아주 밀접한 강점이 있는 반면, 이론적 뒷받침이 보완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의 해결책으로 해운업계 권위자들을 감수자로 선정, 원고를 보완하는 방식을 취하기로 했다. 우선 원고 성격을 ▲일반 해운용어 ▲컨테이너 및 운임 동맹 관련용어 ▲차터링 용어 등 세 가지 분야로 크게 분류했다.
대표 감수자 겸 일반 해운 용어 감수자로 당시 이준수 해기사협회 회장이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해양대 1기인 이준수 회장은 해양대 학장을 역임한 후 현직 교수이자 해기사협회 회장이라는 해운 단체장이기도 해서 더 이상 적임자가 없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이준수 회장이 승낙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이에 필자는 해기사협회에 회장의 공식 인터뷰부터 요청, 성사시켰다. 부산으로 내려가 이준수 회장과 인터뷰를 하면서 해운업계에서 이준수 회장에 대한 평판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이 회장은 아주 겸손한 분으로 학문적 전문성 또한 탁월성을 인터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인터뷰가 끝난 뒤 필자가 감수 얘기를 꺼냈다.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필자가 수차례 간곡히 설득하면서 한국 최초의 작업으로 무역업계에도 도움이 되는 출판물임을 강조했다. 궁극적으로 해운에 대한 국민적 인식 제고에도 큰 몫을 할 수 있는 단행본인 만큼 도와줄 것을 간곡히 설득, 마침내 이 회장의 승낙을 받아냈다. 그리고 몇 주 후 그 때는 원고를 가지고 다시 찾아뵙겠다며 다음 만나는 약속까지 확정했다.
이렇게 해서 부산 해기사협회로 이준수 회장을 몇 차례 더 만난 뒤 마침내 여름 방학이 끝난 시점에서 이준수 교수가 감수 한 원고를 확보하게 되었다.
컨테이너 및 운임 동맹 관련 해운 용어는 당시 FEFC 김성응 한국 대표를 만나 그 자리에서 감수를 확정했다. 김성응 대표는 일선 기자 시절부터 해운계의 어떤 해운인보다 가깝게 지내고 있던 긴밀한 사이였다.
70년대 초 김성응 대표가 해운공사 런던지점장을 마치고 귀국, FEFC 한국 대표로 새로운 분야의 한국 책임자를 맡으면서 가장 먼저 필자를 해운 주간지 사무실로 찾아왔던 분야다.
유일한 해운 취재기자인 필자에게 운임 동맹의 성격과 현황부터 설명하면서 앞으로 협조를 부탁하는 김성응 대표의 겸손함과 업무에 대한 열정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FEFC에 관해서는 신입 기자 시절부터 한국항에 대한 차별선임 부과와 각종 규제 등의 기사를 많이 다루어 온 바 있어 낯설지는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김 대표와의 인연은 그 후 한국 해운ᆞ무역계의 뜨거운 감사로 떠오른 비동맹 선사 문제와 관련, 동맹의 입장을 대변하는 한국 해운인으로 필자에 의해 자주 해운 주간지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용선에 관련된 해운 용어 감수는 가장 까다로운 분야인 만큼 실제 차터링 업무를 다루고 있던 뉴코리아해운 박광택 차장에게 의뢰했다. 박 차장의 해운계에 흔하지 않은 필자의 대구 동향 해운인으로 뉴코리아해운 사원 시절부터 필자와 인연을 맺어 친한 사이가 된 바 있었다.
뉴코리아해운 김윤희 사장도 대구의 경북대 사대부속중학교의 필자 선배이기도 해서 일선 기자 시절 자주 출입했던 터여서 박광택 차장과는 선적대담(하주와의 대담) 등으로 긴밀한 사이였기에 어떤 어려움도 없이 협조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렇게 감수 작업을 마쳤다.
3
자체 편집 및 제작 과정을 거쳐 80년 10월 말 ‘해운 용어 해설’이 한 권의 단행본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런데 10.26 사건으로 계엄령이 선포되어 모든 출판물은 계엄사의 승인을 받아야 판매가 가능해졌다. 필자가 직접 단행본을 들고 서울시청에 임시 마련된 출판물 검열관(육군 대위였다.)에 확인 도장을 받고 판매를 시작했다.
11월 한 달 동안은 그야말로 선하주 양쪽으로부터 폭발적으로 반응이 나타나 11월 중순에 이르자 제반 비용을 커버한 뒤 본격적인 수익이 시현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11월 말 대한해운공사가 대한선주로 사명을 변경한 것을 기념하여 일본의 해운 용어 사전을 그대로 번역, 단행본을 만들어 무료로 업계에 배포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필자가 저술한 해운 용어 해설의 유가 판매는 종전의 기세가 완전 사그라지고 말았다. 이처럼 필자의 첫 번째 단행본은 그야말로 온갖 우여곡절을 다 겪은 책자로 기억되게 되었다.
- 이종옥 발행인 -
1980년 7월 15일 필자가 몸담고 있던 해운 주간지 이 모 발행인(사장)의 워커힐 아파트에 간부진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이 사장의 43세 생일을 맞아 해운 주간지에서 타이틀이 있는 모든 임직원들이 저녁을 함께 한 뒤 차를 마시며 회사의 장래에 대한 의견 개진을 하기 위해서였다.
10여 년 이상 국내 유일의 해운 주간지로서 독점적 지위와 편안을 누려왔던 호시절이 가고 경쟁 주간지가 등장함에 따른 일종의 대책 회의 성격도 갖고 있던 회의였다.
1
참석자는 이 사장 외 정 모 편집국장, 편집차장인 필자, 그리고 이 모 총무ᆞ영업 담당 차장, 한 모 경리 담당 과장대리, 김 모 영업담당 주임 등이었다.
우선 80년대 초부터 필자에 의해 원고가 작성되고 있던 ‘해운 용어 해설’ 단행본 발간의 진행 상황에 대해 필자의 설명으로 회의는 진행되어 나갔다. 10월 말까지 단행본을 발간하기로 하고 이에 따른 전사적 지원을 이 사장이 지시했다.
그리고 향후 해운 주간지 발전에 대해 각자 의견 발표를 사장이 요구했으나 아무도 어떤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필자가 나서 출판 분야로의 진출 강화가 가장 효과적인 방향임을 제시했다.
경쟁지에 비해 10여 년의 역사가 쌓여진 자료 등을 기초로 연 1회 정기 발행의 ‘해사 연감’과 영문판 해운 편람인 ‘쉬퍼스 가이드’ 발간을 제시, 2년 이내에 결과물을 해운계에 내놓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이 모든 출판물을 필자 혼자서 저술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해운 용어 해설’은 유가 판매에 진력, 이를 전사적으로 매달려야 함을 강조하는 사장의 지시가 있었다. 그리고 해사연감이나 쉬퍼스가이드의 사전 광고 확보에 총무ᆞ영업부서의 각별한 노력이 요구된다는 사장의 언급으로 회의는 끝났다.
2
당장 눈앞의 과제인 해운 용어 해설 단행본 발간에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원고는 수년 전부터 필자가 틈틈이 작성, 이미 완성된 상태였다. 하지만 기사에서 추출한 형태여서 실제 업계의 현실과는 아주 밀접한 강점이 있는 반면, 이론적 뒷받침이 보완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의 해결책으로 해운업계 권위자들을 감수자로 선정, 원고를 보완하는 방식을 취하기로 했다. 우선 원고 성격을 ▲일반 해운용어 ▲컨테이너 및 운임 동맹 관련용어 ▲차터링 용어 등 세 가지 분야로 크게 분류했다.
대표 감수자 겸 일반 해운 용어 감수자로 당시 이준수 해기사협회 회장이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해양대 1기인 이준수 회장은 해양대 학장을 역임한 후 현직 교수이자 해기사협회 회장이라는 해운 단체장이기도 해서 더 이상 적임자가 없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이준수 회장이 승낙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이에 필자는 해기사협회에 회장의 공식 인터뷰부터 요청, 성사시켰다. 부산으로 내려가 이준수 회장과 인터뷰를 하면서 해운업계에서 이준수 회장에 대한 평판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이 회장은 아주 겸손한 분으로 학문적 전문성 또한 탁월성을 인터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인터뷰가 끝난 뒤 필자가 감수 얘기를 꺼냈다.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필자가 수차례 간곡히 설득하면서 한국 최초의 작업으로 무역업계에도 도움이 되는 출판물임을 강조했다. 궁극적으로 해운에 대한 국민적 인식 제고에도 큰 몫을 할 수 있는 단행본인 만큼 도와줄 것을 간곡히 설득, 마침내 이 회장의 승낙을 받아냈다. 그리고 몇 주 후 그 때는 원고를 가지고 다시 찾아뵙겠다며 다음 만나는 약속까지 확정했다.
이렇게 해서 부산 해기사협회로 이준수 회장을 몇 차례 더 만난 뒤 마침내 여름 방학이 끝난 시점에서 이준수 교수가 감수 한 원고를 확보하게 되었다.
컨테이너 및 운임 동맹 관련 해운 용어는 당시 FEFC 김성응 한국 대표를 만나 그 자리에서 감수를 확정했다. 김성응 대표는 일선 기자 시절부터 해운계의 어떤 해운인보다 가깝게 지내고 있던 긴밀한 사이였다.
70년대 초 김성응 대표가 해운공사 런던지점장을 마치고 귀국, FEFC 한국 대표로 새로운 분야의 한국 책임자를 맡으면서 가장 먼저 필자를 해운 주간지 사무실로 찾아왔던 분야다.
유일한 해운 취재기자인 필자에게 운임 동맹의 성격과 현황부터 설명하면서 앞으로 협조를 부탁하는 김성응 대표의 겸손함과 업무에 대한 열정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FEFC에 관해서는 신입 기자 시절부터 한국항에 대한 차별선임 부과와 각종 규제 등의 기사를 많이 다루어 온 바 있어 낯설지는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김 대표와의 인연은 그 후 한국 해운ᆞ무역계의 뜨거운 감사로 떠오른 비동맹 선사 문제와 관련, 동맹의 입장을 대변하는 한국 해운인으로 필자에 의해 자주 해운 주간지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용선에 관련된 해운 용어 감수는 가장 까다로운 분야인 만큼 실제 차터링 업무를 다루고 있던 뉴코리아해운 박광택 차장에게 의뢰했다. 박 차장의 해운계에 흔하지 않은 필자의 대구 동향 해운인으로 뉴코리아해운 사원 시절부터 필자와 인연을 맺어 친한 사이가 된 바 있었다.
뉴코리아해운 김윤희 사장도 대구의 경북대 사대부속중학교의 필자 선배이기도 해서 일선 기자 시절 자주 출입했던 터여서 박광택 차장과는 선적대담(하주와의 대담) 등으로 긴밀한 사이였기에 어떤 어려움도 없이 협조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렇게 감수 작업을 마쳤다.
3
자체 편집 및 제작 과정을 거쳐 80년 10월 말 ‘해운 용어 해설’이 한 권의 단행본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런데 10.26 사건으로 계엄령이 선포되어 모든 출판물은 계엄사의 승인을 받아야 판매가 가능해졌다. 필자가 직접 단행본을 들고 서울시청에 임시 마련된 출판물 검열관(육군 대위였다.)에 확인 도장을 받고 판매를 시작했다.
11월 한 달 동안은 그야말로 선하주 양쪽으로부터 폭발적으로 반응이 나타나 11월 중순에 이르자 제반 비용을 커버한 뒤 본격적인 수익이 시현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11월 말 대한해운공사가 대한선주로 사명을 변경한 것을 기념하여 일본의 해운 용어 사전을 그대로 번역, 단행본을 만들어 무료로 업계에 배포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필자가 저술한 해운 용어 해설의 유가 판매는 종전의 기세가 완전 사그라지고 말았다. 이처럼 필자의 첫 번째 단행본은 그야말로 온갖 우여곡절을 다 겪은 책자로 기억되게 되었다.
- 이종옥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