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노벨의학상 수상자 한스셸리 박사는 스트레스가 인체에 미치는 의학적 현상을 연구 전 세계적 명성을 얻은 바 있다. 그리고 스트레스 방지책으로 ‘감사’를 설파하기도 했다.
필자가 반세기에 가까운 오랜 세월동안 글을 쓰면서 지내온 것에 늘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 따라서 필자는 그것이 사설이든, 칼럼이든 또는 해운인 평전 혹은 해운기업사 건 원고를 작성하면서 힐링을 경험하는 편이다.
1
국민학교(오늘의 초등학교) 5학년 시절 나관중 저 삼국지를 처음 읽고 너무나 재미있어서 연이어 5번이나 읽은 기억이 있다. 이후 역사 소설에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중학교 1학년 때 김동리의 ‘운현궁의 봄’을 읽은 후 역사소설만 찾아다니며 읽었다. 동시에 영화도 사극이 제일 재미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벤허, 스팔타쿠스, 리어왕, 쿼바디스, 폼페이 최후의 날, 알렉산드리아 대왕 등 지금도 사극 영화의 줄거리를 기억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 중 쿼바디스의 마지막 장면, 베드로 사도가 탈출하면서 자신의 지팡이를 땅에 꽂아 두었는데,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그 마르디 마른 지팡이에서 새로운 싹이 나오는 장면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글 쓰는 작업에 재미가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계속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늘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에다 오랜 세월 글 쓰는 일에 매달리다 보니 필자가 가장 잘 하는 분야 역시 글 쓰고 주간지나 단행본을 만드는 일임을 절감하고 있다.
당연히 글 쓰는 작업에 대한 자부심 또한 투철한 편이다. 곁들여 글 쓰는 작업과 연관되어 해운 경영인들의 숨겨진 진면목을 쉽게 목도할 수 있기도 했다. 이에 오늘은 해운 경영인 60여명의 평전을 신문에 연재하고 단행본으로 발간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해운인들의 또 다른 얼굴에 대해 언급해 보기로 하겠다.
2
평전에 관련된 부적절한 기분 나쁜 기억을 회고하기에 앞서 참으로 보람 있었고 즐거웠던 해운 경영인들의 경우를 소개한 후 본론에 들어가고자 한다. 평전 취재 시는 물론이고 기사화 또는 출판화 되고 난 뒤에도 정말로 보람과 기쁨을 주신 해운 경영인들이 아주 많다.
현역인 KCTC 신태범 회장과 유니버살로지스틱스그룹의 이용기 회장, 그리고 은퇴한 분으로는 배주원 회장을 빠뜨려 놓을 수 없다. 그리고는 대부분 작고한 분들이다. 윤종근 회장, 이맹기 회장, 조상욱 회장, 양재원 회장, 김윤석 회장 같은 해운인과의 남다른, 그리고 의미 있는 추억들이 존재한다.
반면 평전을 저술하는 과정에서 인간적으로 실망감을 절감한 해운 경영인들도 적지 않다. 우선 J회장의 경우이다. J회장은 국적선 운항과 대리점임을 병행하던 D해운 선장 출신이다. D해운 창업자 Y회장이 일본 대형선사 유치과정에서 기여한 공로로 D해운 계열사로 새로이 창업된 또 다른 K해운의 CEO로 발탁되었다.
그런데 야망이 남달랐던 J회장이 일본 본사 임원들과 개인적 친분을 활용, 창업자 Y회장의 영향력을 최소화, 자신의 대리점 선사 K해운을 개인 회사화 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계열사 설립은 물론이고 자체 빌딩까지 건축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이 시기 필자는 J회장의 평전을 연재하게 되었다.
특히 J회장은 K해운의 이익 실현에 따른 조치로 대주주 30%, 사내 유보 30%, 그리고 나머지는 K해운 임직원들에게 배분하고 있다고 자랑이 대단했다. 그래서 필자 또한 이 점을 크게 부각한 내용을 활자화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얼마 후 J회장의 이 같은 자랑은 완전 거짓말이었다. 임직원에 돌아가는 이익 배분은 지극히 형식적이고 겉치레일 뿐 대부분의 이윤을 자신이 독식하고 있음을 K해운에 근무하고 있는 간부에 의해 확인, J회장에 대해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해운인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나 어떤 사안에 대해 과장을 하는 사례가 많다. 하지만 J회장처럼 완전 새빨간 거짓말은 잘 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J회장은 정직과는 거리가 먼 해운 경영인이었다.
거짓말은 아니더라도 자신의 과거에 감추고 싶은 사항은 철저히 숨긴 C회장도 평전 연재시 참으로 실망한 케이스였다. 물론 교회 중직자인 C회장은 해운계에서 알아주는 구두쇠여서 그랬다고 생각은 되지만 과거 대학 입학 시 외국 선교사에게 도움을 받아 학업을 마친 사연은 필자가 추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다.
타인의 도움을 받아 대학까지 마친 C회장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사회에 전혀 환원하지 않은 드문 케이스라 생각된다.
해운인 평전을 집필하면서 가장 황당한 사연은 2004년 K사장의 해운계 발자취를 신문에 연재하면서 시작되었다. K사장은 어느 외국계 해운 관련 업체의 CEO로 근무하던 1980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래서 평전 신문 연재가 끝나면 이를 토대로 한 권의 단행본으로 발간하자는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렇게 연재가 1년 여 동안 계속되어 2005년 초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K사장이 식사를 같이 하자며 어느 고급 식당으로 필자를 데려가 즐겁게 식사 교제를 나누었다. 그리고 차까지 마시는 자리에서 느닷없이 자신의 해운계 발자취를 자신이 자전 형태로 다시 작성, 단행본 발간을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며 이제 더 이상 필자의 도움을 받지 않겠노라고 뜻밖의 통고를 해 왔다.
그렇게 K사장에게 일방적인 이별 통고를 받은 후 수 개월이 지나 K사장의 자전이 발간되었는데, 내용이 기가 막혔다. 필자가 “K사장은 ... ”이라고 표현한 문장을 “나는 ... ” 식으로 주어만 바꾸어 원고를 완성, 그야말로 필자를 기만하고 자전 단행본을 세상에 내어놓은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이 필자가 해운인 평전 작업을 하면서 겪은 가장 황당한 사건이다. 참고로 K사장은 훗날 해난 사고와 관련하여 국익에 반하는 행태를 보이는 등 필자를 기만하던 행태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나타낸 바 있다. 이후 K사장은 업계에서 이름이 거론되기만 해도 손가락질을 받는 등 최악의 해운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 이종옥 발행인 -
1958년 노벨의학상 수상자 한스셸리 박사는 스트레스가 인체에 미치는 의학적 현상을 연구 전 세계적 명성을 얻은 바 있다. 그리고 스트레스 방지책으로 ‘감사’를 설파하기도 했다.
필자가 반세기에 가까운 오랜 세월동안 글을 쓰면서 지내온 것에 늘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 따라서 필자는 그것이 사설이든, 칼럼이든 또는 해운인 평전 혹은 해운기업사 건 원고를 작성하면서 힐링을 경험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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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오늘의 초등학교) 5학년 시절 나관중 저 삼국지를 처음 읽고 너무나 재미있어서 연이어 5번이나 읽은 기억이 있다. 이후 역사 소설에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중학교 1학년 때 김동리의 ‘운현궁의 봄’을 읽은 후 역사소설만 찾아다니며 읽었다. 동시에 영화도 사극이 제일 재미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벤허, 스팔타쿠스, 리어왕, 쿼바디스, 폼페이 최후의 날, 알렉산드리아 대왕 등 지금도 사극 영화의 줄거리를 기억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 중 쿼바디스의 마지막 장면, 베드로 사도가 탈출하면서 자신의 지팡이를 땅에 꽂아 두었는데,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그 마르디 마른 지팡이에서 새로운 싹이 나오는 장면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글 쓰는 작업에 재미가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계속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늘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에다 오랜 세월 글 쓰는 일에 매달리다 보니 필자가 가장 잘 하는 분야 역시 글 쓰고 주간지나 단행본을 만드는 일임을 절감하고 있다.
당연히 글 쓰는 작업에 대한 자부심 또한 투철한 편이다. 곁들여 글 쓰는 작업과 연관되어 해운 경영인들의 숨겨진 진면목을 쉽게 목도할 수 있기도 했다. 이에 오늘은 해운 경영인 60여명의 평전을 신문에 연재하고 단행본으로 발간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해운인들의 또 다른 얼굴에 대해 언급해 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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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에 관련된 부적절한 기분 나쁜 기억을 회고하기에 앞서 참으로 보람 있었고 즐거웠던 해운 경영인들의 경우를 소개한 후 본론에 들어가고자 한다. 평전 취재 시는 물론이고 기사화 또는 출판화 되고 난 뒤에도 정말로 보람과 기쁨을 주신 해운 경영인들이 아주 많다.
현역인 KCTC 신태범 회장과 유니버살로지스틱스그룹의 이용기 회장, 그리고 은퇴한 분으로는 배주원 회장을 빠뜨려 놓을 수 없다. 그리고는 대부분 작고한 분들이다. 윤종근 회장, 이맹기 회장, 조상욱 회장, 양재원 회장, 김윤석 회장 같은 해운인과의 남다른, 그리고 의미 있는 추억들이 존재한다.
반면 평전을 저술하는 과정에서 인간적으로 실망감을 절감한 해운 경영인들도 적지 않다. 우선 J회장의 경우이다. J회장은 국적선 운항과 대리점임을 병행하던 D해운 선장 출신이다. D해운 창업자 Y회장이 일본 대형선사 유치과정에서 기여한 공로로 D해운 계열사로 새로이 창업된 또 다른 K해운의 CEO로 발탁되었다.
그런데 야망이 남달랐던 J회장이 일본 본사 임원들과 개인적 친분을 활용, 창업자 Y회장의 영향력을 최소화, 자신의 대리점 선사 K해운을 개인 회사화 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계열사 설립은 물론이고 자체 빌딩까지 건축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이 시기 필자는 J회장의 평전을 연재하게 되었다.
특히 J회장은 K해운의 이익 실현에 따른 조치로 대주주 30%, 사내 유보 30%, 그리고 나머지는 K해운 임직원들에게 배분하고 있다고 자랑이 대단했다. 그래서 필자 또한 이 점을 크게 부각한 내용을 활자화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얼마 후 J회장의 이 같은 자랑은 완전 거짓말이었다. 임직원에 돌아가는 이익 배분은 지극히 형식적이고 겉치레일 뿐 대부분의 이윤을 자신이 독식하고 있음을 K해운에 근무하고 있는 간부에 의해 확인, J회장에 대해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해운인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나 어떤 사안에 대해 과장을 하는 사례가 많다. 하지만 J회장처럼 완전 새빨간 거짓말은 잘 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J회장은 정직과는 거리가 먼 해운 경영인이었다.
거짓말은 아니더라도 자신의 과거에 감추고 싶은 사항은 철저히 숨긴 C회장도 평전 연재시 참으로 실망한 케이스였다. 물론 교회 중직자인 C회장은 해운계에서 알아주는 구두쇠여서 그랬다고 생각은 되지만 과거 대학 입학 시 외국 선교사에게 도움을 받아 학업을 마친 사연은 필자가 추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다.
타인의 도움을 받아 대학까지 마친 C회장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사회에 전혀 환원하지 않은 드문 케이스라 생각된다.
해운인 평전을 집필하면서 가장 황당한 사연은 2004년 K사장의 해운계 발자취를 신문에 연재하면서 시작되었다. K사장은 어느 외국계 해운 관련 업체의 CEO로 근무하던 1980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래서 평전 신문 연재가 끝나면 이를 토대로 한 권의 단행본으로 발간하자는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렇게 연재가 1년 여 동안 계속되어 2005년 초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K사장이 식사를 같이 하자며 어느 고급 식당으로 필자를 데려가 즐겁게 식사 교제를 나누었다. 그리고 차까지 마시는 자리에서 느닷없이 자신의 해운계 발자취를 자신이 자전 형태로 다시 작성, 단행본 발간을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며 이제 더 이상 필자의 도움을 받지 않겠노라고 뜻밖의 통고를 해 왔다.
그렇게 K사장에게 일방적인 이별 통고를 받은 후 수 개월이 지나 K사장의 자전이 발간되었는데, 내용이 기가 막혔다. 필자가 “K사장은 ... ”이라고 표현한 문장을 “나는 ... ” 식으로 주어만 바꾸어 원고를 완성, 그야말로 필자를 기만하고 자전 단행본을 세상에 내어놓은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이 필자가 해운인 평전 작업을 하면서 겪은 가장 황당한 사건이다. 참고로 K사장은 훗날 해난 사고와 관련하여 국익에 반하는 행태를 보이는 등 필자를 기만하던 행태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나타낸 바 있다. 이후 K사장은 업계에서 이름이 거론되기만 해도 손가락질을 받는 등 최악의 해운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 이종옥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