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운 칼럼] 해운 주간지 사장 취임 전말

취재부
2020-04-01

어느 한 조직 공채 신입사원으로 입사, 경력을 쌓아 대표이사 사장이라는 톱의 위치에 까지 오른 경력은 좋은 평가를 받게 된다. 우선 한 직장에서 오래 근무했다는 사실과 말단 실무자부터 CEO까지 모든 직책을 거쳐 전문성이 탁월하게 축적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특히 해운 주간지 같은 특수 전문지에서 공채 신입기자로 출발, 대표이사 사장까지 오르는 경력을 지닌 경우는 아주 드물다. 그런데 그 같은 이력을 필자는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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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상무이사 겸 편집인의 위치에서 두 단계를 월반, 전무이사와 부사장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여기에는 간단치 않은 사연이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이 사연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발행인(사주)의 6촌 동생인 L씨와의 관계부터 언급해야 한다.

해운기자 2년차 시절 해운 주간지의 경리 및 총무 업무를 담당하는 인물이 입사했다. 바로 L씨였다. L은 필자와 동향인 대구 출신이었다. 이를 기화로 L은 입사 초기부터 유난히 필자에게 온갖 호의를 베풀었다. 또 사주의 인척답지 않게 낮은 자세를 보여주었다. 특히 필자에게 각별하고 깍듯이 대해 주었다.

나이는 필자보다 2살 더 많았으나 동향 친구로 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필자가 취재팀장(과장)으로 승진할 때 L도 총무과장으로 동일한 직위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차장, 부장을 같은 해에 올랐다.

하지만 임원은 필자가 더 빨리 달았다. 그러다 필자가 상무이사에 취임할 때 L은 계열사인 천안의 도자기 제조 수출 회사 상무로 지방 근무를 시작했다.

그런데 해운 주간지는 나날이 수익성이 제고되는 것과 달리 도자기 회사는 적자가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이에 발행인 회장은 L을 가혹하리만치 닦달, 이를 견디다 못한 L은 사표 한 장을 책상위에 두고 서울로 올라와 버렸다. 그리고는 필자를 찾아왔다. 새로운 해운 매체를 발간하겠다며 제반 서류 작성을 부탁해 왔다.

이때가 아마도 1983년경이었다. 당시만 해도 신규 매체는 어떤 분야이든 철저하게 규제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L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 때 청와대 홍보 수석이 자신의 학창 시절 가정교사로 인연을 맺은 바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마침내 도자기 회사가 부도 직전으로 몰리자 회장은 해운 주간지 주주를 차명으로 돌려놓고 해운 주간지 사장에 L을 앉혔다. 그래도 자신의 인척을 믿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법적인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2-3년 정도 도피할 결심을 하고 해운 주간지 임원들을 양수리 음식점에 불러 자신의 처지를 설명한 뒤 L을 사장으로 하는 회사 경영에 차질이 없도록 당부하고 또 당부한 뒤 잠수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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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지에 예전 동료를 상사로 모셔야 할 처지가 된 필자는 유쾌하지 못했다. 하지만 편집에 문외한 L이 편집국의 인사를 비롯한 모둔 권한을 필자에게 일임하겠다며 도와줄 것을 간청, 응낙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L은 회사의 경리·총무를 제외한 모든 사항의 결정권을 필자에게 일임했다. 그리고 자신은 오전까지만 근무, 필자와 점심식사를 같이 한 뒤 퇴근해 버렸다.

매일 자신의 고교(경북고) 5년 선배인 서인곤 사장과 술집을 드나들었다. 비용은 과거 회장에게 빼주던 회사 공금을 이번에는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넣는 수법을 사용했다.

노련한 회장은 자신이 심어놓은 직원으로 부터 L의 이 같은 방탕과 태만을 다 보고받고 있었다. 그리고 도피한지 3년이 되어 법적인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자 전격적으로 해운 주간지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L은 예전의 회장 수족 노릇하던 그 때의 인물이 아니었다. 회장과 L간 경영 분쟁이 본격화 필자가 관장하던 편집국 업무를 제외한 나머지 분야에서 사사건건 서로 날을 세웠다. 주주를 장악하고 있던 회장이 단연 유리했지만 L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회사를 나가라는 회장에게 필자를 통해 그동안 회장이 저지른 재정 및 경리 문제를 들고 나왔다.

만약 강제로 자신을 퇴출시키면 그날로 경리 장부를 들고 세무 당국에 가서 해운 주간지를 공중분해 시키겠다고 위협하는 짓거리를 서슴지 않았다. 한 순간에 6촌 형제가 불구대천지 원수 사이가 되고 말았다.

가장 곤란한 일은 편집국 업무를 제외한 회사, 모든 결재 서류를 두 부씩 작성해야 했다. 특히 경리 및 총무 업무 직원들의 고생이 막심했다. 회장은 자신이 회사 주인임을 내세워 자신의 결제를 받아야 모든 집행이 가능하다고 직원들을 닦달했다.

L역시 자신이 해운 주간지의 법적인 대표이사인 만큼 자신의 허락 없이 경비를 집행하면 공금 횡령이라며 결재 서류를 요구했다. 졸지에 동일한 결재 서류를 두 부씩 작성, 회장과 L에게 결재를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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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촌 형제간인 회장과 사장은 서로 만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상호 비난의 강도만 높여갔다. 어쩔 수 없이 두 사람과 모두 소통이 원활한 필자가 중재자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고교 졸업 후 경부고속도로 공사판에 떠돌던 녀석을 불러 대졸 대우를 하면서 사장까지 승진시켜 주었더니 배은망덕한 짓거리를 하고 있다”며 노발대발하는 회장에게 회사 존립을 생각해서 적당한 보상책을 강구, 순순히 퇴직하게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사장인 L에게는 “어떻든 형님이니 심한 언행은 자제하고 사직에 따른 보상을 챙겨 나가는 것이 순리이자 남아있는 임직원에 대한 도리가 아니겠느냐?”라고 간곡하게 달랬다.

결국 퇴직 보상금액 조정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양쪽을 수 없이 오고 간 끝에 요즈음 화폐 가치로 2-3억 원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L을 정리하자 사주 회장은 후임 사장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외부 인사로는 흐트러진 조직을 추스를 인물이 없다고 판단, 상무이사인 필자에게 대표이사 사장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1986년 필자가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 이종옥 발행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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