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주주와 전문 경영인 함수관계

취재부
2020-04-01

일반 대기업 대부분이 그러하듯 한국 1위 해운기업이었던 해운공사나 한진해운 역시 대주주와 전문 경영인 투톱의 경영진에 의해 회사가 이끌어졌다.

국영해운 회사로 출발했던 해공은 60년대 중반 민간인 김연준 한양대 총장에게 넘겨졌다. 그리고 김 총장은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 주요한 사장을 전문 경영인으로 영입했다.

이 조합은 상당히 바람직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무엇보다 주요한 회장은 인자하고 겸손한 성품으로 화려한 경력자답지 않은 대외 관계를 유지했다. 또 해공이 조직관리 측면에서도 성공적인 행보를 보여주었다. 간부회의 중에도 일선 실무자의 의견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면 거리낌 없이 실무자를 참석시켜 의견을 개진하게 하는 소통의 달인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해공 임직원들로 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다만 70년대에 들어 세계적 해상운송의 컨테이너화를 실현시켜야 하는 난제 때문에 경영상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70년대 말 이 작업도 실현시켰으나 사직하고 말았다. 그리고 새로운 CEO로 영입된 인물이 해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김연준 대주주의 처가쪽의 백씨 집안 인물이 해공 경영을 담당하면서 해공은 난맥상을 보이고 말았다.

부흥부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내 산업 전반에 정통했던 주요한 사장은 해공 CEO 부임 후 빠른 시일 내에 회사 업무를 완벽히 파악했지만 후임 사장은 그러하지 못했다. 갖가지 시행착오를 범함으로써 해공의 조직력은 급격히 저하되어 끝내 서주산업의 윤석민 회장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또 하나 대주주 회장과 전문 경영인 사장간 훌륭했던 조합은 이맹기 대한해운 회장과 장학세 사장간이었다. 이맹기 회장의 해군사관학교 후배이기도 했던 장학세 사장은 지극한 충성심으로 임직원을 아끼는 이맹기 회장의 경영방침을 확실하게 실현시킨 바 있었다.

하지만 이맹기 회장 타계 후 2세 이진방 회장이 임명한 김 사장은 과도한 욕심으로 용대선 규모를 엄청나게 확장, 회사가 도산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이 회장의 대학 후배로 국내 최고의 명문대를 졸업한 후 대한해운에서 오랫동안 근무, 해운 전문성은 남달랐으나 앞날을 내다보는 판단력이나 또 선대확대 자제력은 결여된 전문 경영인을 사장을 앉혀 불행한 결과를 도출해 내고 말았다.

또 하나 좋은 사례가 한진해운의 경우이다. 선대 조중훈 창업자로부터 한진해운은 물려받은 조수호 회장은 박정원 사장을 CEO로 승진 발탁, 한진해운을 한국 제 1의 해운회사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박정원 사장은 한양대 화공과를 졸업한 뒤 해운공사에 공채로 입사, 실무자 시절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해공의 미주 현지 법인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따라서 해외 거래선 및 해운인들과 남다른 교분을 쌓은 경력을 조수호 회장이 눈여겨 본 뒤 해공이 한진해운에 합병된 뒤에도 계속 고위 임원으로 발탁된 뒤 마침내 CEO의 위치에 까지 올랐다.

이에 보답하듯 박 사장은 능력을 마음껏 발휘했고 한진해운도 탄탄한 기반을 다졌다. 하지만 조수호 회장의 급작스러운 타계로 해운에 문외한 일 뿐 아니라 개인적 욕심이 지나쳤던 미망인 최은영씨가 회장에 취임하여 자신의 심복을 대표이사 사장에 앉히고 박정원 사장을 퇴직시키면서 한진해운은 기울어지기 시작, 마침내 도산하는 아픔을 겪고 말았다.

이처럼 대주주 회장과 전문 경영인 사장간의 결합 여부에 따라 해운 기업들의 운명은 극명하게 달라졌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특히 해운 전문성이 부족한 대주주가 이를 보완할 만한 전문 경영인을 영입하지 못한 경우, 대부분 해당 해운 기업은 쇄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또 대주주 사주 회장의 전횡을 막지 못하고 그저 지시하는 불법 경영, 특히 분식 회계 같은 경영 비리를 묵인한 CEO가 버티고 있던 해운 기업의 회장-사장의 조합도 불행의 단초를 제공했음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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