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운 칼럼] 해운 주간지 초창기 스케줄 업무로 곤욕

취재부
2020-03-10

만 5년, 햇수로 6년 동안 어떠한 타이틀도 없는 평기자로 지냈다. 통상 2년 정도 지나면 대리급 초급 간부가 되는 해운 기업과 크게 비교되던 처사이기도 했다.

여기에는 필자의 발행인과 편집국장에 대한 고분고분하지 않은 언행이 한 몫을 단단히 했다. 발행인의 주말 낚시 동행을 단칼에 거절했는가 하면 편집국장의 여기자 편애에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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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여 수준이 워낙 낮은데다가 업무가 과중하다보니 길어야 1년, 짧으면 3개월 만에 사직하고 회사를 떠나는 기자들이 속출했다. 필자만 글 쓰는 일이 좋아 남아 있다 보니 어느 사이에 해운 전문성을 지닌 기자는 필자뿐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편집국장이 신입 여기자 한 명만 남겨놓고 사전에 사직시키고 또 나머지는 자신과 동반 사직서를 제출, 필자와 신입 여기자 한 명만 남아 해운 주간지 기사 및 스케줄 수집과 작성, 그리고 교정 업무까지 해야 하는 발간이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어 버렸다. 발행인과 해운 주간지 발간 지속을 놓고 협상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이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필자 혼자 극복해 낸 다음에 발행인은 필자를 매년 승진시켜 70년대 말 편집차장으로 해운 주간지 편집국의 중심축이 되게 만들었다. 2대 편집국장으로 발행인의 용산고 동기동창이 부임하자 해운에 완전 문외한으로 경영 관련 월간 잡지 편집국장 출신이어서 필자의 역할은 더욱 강화되고 말았다.

이에 필자가 시도한 편집국 체제 개혁의 첫 업무 조정이 기자들의 선박 입출항 스케줄 체크 업무 면제였다. 이러한 스케줄 업무를 전담할 고졸 여직원 3명을 신규 채용한 것이다. 해운 주간지 편집국 소속 기자는 필자와 또 한 명의 취재 기자, 그리고 3명 정도 외신 기자가 근무하는 조직이었다. 외신기자 3명 중 일어 번역 1명, 나머지는 영어 번역 기자였다.

이렇게 필자 포함 5명의 기자에 모두 해운 회사가 매주 변경 발표하는 한국항 기점 스케줄 자료를 수집, 세계 모든 항구의 ETA/D/를 작성하는 업무와 이의 교정을 담당했다.

필자의 경우를 예로 들어 일주일의 업무 진행도를 밝혀보면, 월요일 오전 오후는 스케줄 수집에 전적으로 매달려야 했다. 이 스케줄 수집은 각 정기라인 별로 수행해야 했다. 예를 들어 에버렛기선만 한정해도 EOL, APL, ScanDutch 등 각 부서별 스케줄 작성 담당자가 별도로 정해져 있었다. 주로 고참 여직원(고졸)이었고 간혹 남자 대졸 신입사원이 담당하기도 했다. 회사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천방지축의 남자 신입사원의 시건방진 태도를 접하게 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70년대 초 필자가 자주 출입하던 에버렛기선의 EOL 파트 스케줄 담당자 홍 모 씨가 APL, ScanDutch는 오전의 약속 시간에 작성을 완료, 수거한 상태에서 EOL만 바쁘다는 구설로 3번째 발걸음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도 스케줄 작성은 여전히 미완성이었다.

화가 나서 회사에 대한 책임감이 왜 이렇게 부족하느냐고 나무랐다. 그랬더니 이 친구 “내 마음이지”라는 당돌한 대답에 더욱 화가 나서 고함을 치고 말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면 홍 사원의 직속 상사 최기석 과장이 나서 필자에게 백배 사과하고 앞으로는 자기가 시간을 어기지 않고 정확히 작성해 놓겠다며 필자의 화를 풀어주었다.

게다가 이 라인별 입출항 스케줄을 해운 주간지 광고 지면으로 사용하다보니 발행인의 관심 또한 각별한 편이었다. 이런 연유로 기자들로 하여금 스케줄 수집까지 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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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자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업무였다. 특히 필자 같은 취재기자로서는 고졸 고참 여직원과 신입사원에게 부탁을 하는 을의 입장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는 스케줄 담당자의 직속 상사와 관련 부서의 임원은 물론이고 대표이사 사장까지 아는 사이여서 대놓고 갑질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사전에 약속한 시간에 작성을 해놓지 않아 두세 번 발걸음을 하게 만드는 담당자도 있었다.

보람도 적지 않았다. 앞서 소개한 최기석 과장과 급격히 친해졌다. 서로 개인적 상황까지 대회가 깊어지다 보니 최기석 과장은 필자의 대학과 ROTC 3년 선배였다.

최 과장은 경남중, 용산고 졸업 이력까지 필자의 대구부중, 경동고 졸업과 유사해서 그야말로 절친의 사이가 되었다. 이 관계는 최기석 전무가 선진해운항공 미국 현지법인장으로 출국할 때 까지 지속되었음은 물론이다.

또 하나 스케줄 업무과 관련된 달콤한 추억도 있다. 해운 기자 2년차 총각기자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K해운의 스케줄 담당자K는 배구선수 출신의 입사 4년차의 고참 고졸 여직원이었다.

유난히 필자에게 친절했던 K양은 당시 여자로서는 찾아보기 힘든 170cm의 장신이었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매력적인 여직원이었다. 어느 날 필자의 사정으로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12시 30분에 혹시나 하는 기대로 K해운에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혼자서 점심을 하지 못한 채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히 필자는 K양에게 점심을 제의, 함께 식사를 했다. 그 후 그해 겨울 K해운 회식 후 K양이 술기운을 이기지 못한 어려움을 도와준 것이 계기가 되어 데이트하는 사이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K양이 K해운의 담당 상사인 과장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을 하게 됨을 계기로 K양과의 사이는 자연스럽게 정리되고 말았다.

스케줄 수거 작업에 따른 또 하나 부수적인 효과는 외신 기자들 장악이 용이해졌다는 사실이다. 외신기자들은 입사 초기 해운 용어 때문에 필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고참 기자가 되어도 필자의 지원이 필요한 또 하나의 분야가 스케줄 수집 업무였다.

간혹 나이든 외신 여기자에 “아줌마”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구사하는 스케줄 담당자가 생기면 필자가 해당 선사 임원에게 항의, 곧바로 시정시키는 조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초대 편집국장의 낙하산으로 입사한 외신기자들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필자에 호의를 베푸는 지경에 이르자, 이를 보다 못한 편집국장이 특별히 자신이 아끼는 여기자는 스케줄 업무에서 배제시키는 조치까지 단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좋은 일 보다 불편함이 많은 이러한 스케줄 수집 업무를 기자들이 하지 않도록 조치한 것은 두고두고 생각해도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된다.


- 이종옥 발행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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