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1950년 국영 해운기업 대한해운공사가 설립되면서 한국의 해운 역사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50년대는 6.25전쟁으로 해운 역시 피폐화됨으로써 50년대 전체를 볼 때 한국의 해운업은 내항해운이 주도했다고 봄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달성에 의거, 무역물동량이 급격히 증가되기 시작하면서 내항해운과 외항해운이 엇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가 하나 있다.
1970년대 초 해운 행정을 관장하던 교통부가 발간한 ‘한국의 해운’ 책자이다. 당시 한국 해운산업은 물론이고 해운행정, 해운단체 등이 망라되어 있는 이 책자의 마지막 부분에 해운조합과 선주협회 회원사 명단이 나란히 수록되어 있다.
흥미로운 바는 외항해운업을 대표하는 대한해운공사를 비롯해 고려해운, 남성해운, 근해상선 등 상당수의 해운 기업들이 해운조합과 선주협회에 회원사로 함께 가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외항업과 내항업을 겸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양 단체가 공동으로 한국 해운을 대표하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60년대 한국 해운의 또 하나 특징은 한일 또는 동남아 노선 등 근거리 원양항로 또한 국적선사들 중 상당수가 대리점선사를 겸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같은 추세는 70년대 내내 이어져 왔다.
예를 들어 고려해운이 일본선사 NYK 대리점을 겸하고 있었고 협성쉬핑이 일본선사 MOL의 한국GSA였다. 그리고 동서해운도 동남아항로의 홍콩선사 PCL 대리점선사이기도 했다. 흥아해운도 한일, 동남아항로와 일본선사 Japan Line의 한국대리점선사였다.
또 70년대 들어 한국에 해상운송의 컨테이너화가 상륙하면서 대리점선사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원양항로인 북미항로 취항 유일의 국적선사인 대한해운공사가 재래선 운항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미, 유럽, 호주 등 모든 원양항로의 풀 컨 서비스는 외국선사의 한국대리점선사가 컨테이너 운송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70년대 원양 정기 풀 컨 서비스를 한국에서 실시하고 있던 외국선사의 한국GSA 선사로 비중이 큰 대리점선사는 고려해운, 협성쉬핑은 월드와이드한 네트워크의 NYK, MOL 한국GSA 선사였다. 에버렛기선이라는 대리점선사가 존재했다. 에버렛기선은 북미항로 취항 APL, 유럽항로의 ScanDutch와 Nedlloyd, 그리고 호주항로의 J.Lauritzen, 중동항로의 Jahnson, 동남아 항로의 EOL 등 그야말로 월드와이드한 서비스 네트워크를 자랑, 한국의 대리점선사를 이끌고 있었다.
특히 EOL은 해방 직후 한국-동남아 원양항로에 최초로 배선한 선사로서 외국 법인인 에버렛기선은 특히 한국의 수출입 해상운송에 크게 기여한 대리점 선사이기도 했다. 당연한 결과로 적지 않은 해운 경영인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윤인석 사장, 이동혁 사장, 김천수 부사장, 이윤수 부회장, 김원창 사장, 윤귀남 상무, 최기석 상무, 최강일 상무 등이 바로 에버렛 출신들이다.
8.15 광복 후 한국의 대리점선사를 확실히 주도한 해운인은 얼마 전 타계한 왕상은 회장이다. NYK를 제외한 일본선사 대부분과 유럽선사 대부분이 왕상은 회장에 의해 한국 대리점선사 업무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70년대 한국의 컨테이너 운송이 상륙되면서 서비스 노선이 겹쳐 대다수 외국선사 GSA 업무가 다른 한국 대리점 선사로 넘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1951년부터 2016년까지 70년 동안 왕상은 회장이 설립한 협성 및 범주해운이 일본선사 MOL의 한국 대리점선사였다는 사실은 한국 외항해운사에 길이 기록될 역사이기도 했다. 이러한 대리점선사들의 한국 해운사적 또 다른 의미는 국적 원양정기선사들의 길잡이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이다. 고려해운의 북미 컨테이너 서비스는 시작이 NYK와의 공동운항 형태였다. MOL과 범주해운 역시 한국-서아프리카 정기노선에 공동운항으로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또 한진해운의 원양 풀 컨 서비스의 개시 역시 (주)한진이 세계 최초의 해상운송 컨테이너화를 실현한 미국 선사 Sea-Land와의 제휴로 부터 출발했다.
이 밖에 70년대 한국 외항 해운업의 주역이었던 대리점 선사로 극동선박, 한국해운, 범세해운, 신일해운, 신영해운, 오주해운, 아신해운 등을 빠뜨려 놓을 수 없다. 극동선박은 미국선사 USL과 Lykes, 또 범세해운은 덴마크 선사 Maersk의 한국 대리점선사였다.
그리고 신영해운은 대만선사 Evergreen, 한국해운은 미국 선사 PFEL, 오주해운은 일본선사 YSL, 신일해운은 일본선사 Showa, 아신해운은 싱가포르 국영선사 NOL의 한국대리점선사로 원양상선의 풀 컨 서비스를 한국에서 시행한 바 있다.
그런데 이 같은 한국 외항해운계의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대리점 선사 대부분이 별다른 기록 없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1950년 국영 해운기업 대한해운공사가 설립되면서 한국의 해운 역사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50년대는 6.25전쟁으로 해운 역시 피폐화됨으로써 50년대 전체를 볼 때 한국의 해운업은 내항해운이 주도했다고 봄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달성에 의거, 무역물동량이 급격히 증가되기 시작하면서 내항해운과 외항해운이 엇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가 하나 있다.
1970년대 초 해운 행정을 관장하던 교통부가 발간한 ‘한국의 해운’ 책자이다. 당시 한국 해운산업은 물론이고 해운행정, 해운단체 등이 망라되어 있는 이 책자의 마지막 부분에 해운조합과 선주협회 회원사 명단이 나란히 수록되어 있다.
흥미로운 바는 외항해운업을 대표하는 대한해운공사를 비롯해 고려해운, 남성해운, 근해상선 등 상당수의 해운 기업들이 해운조합과 선주협회에 회원사로 함께 가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외항업과 내항업을 겸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양 단체가 공동으로 한국 해운을 대표하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60년대 한국 해운의 또 하나 특징은 한일 또는 동남아 노선 등 근거리 원양항로 또한 국적선사들 중 상당수가 대리점선사를 겸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같은 추세는 70년대 내내 이어져 왔다.
예를 들어 고려해운이 일본선사 NYK 대리점을 겸하고 있었고 협성쉬핑이 일본선사 MOL의 한국GSA였다. 그리고 동서해운도 동남아항로의 홍콩선사 PCL 대리점선사이기도 했다. 흥아해운도 한일, 동남아항로와 일본선사 Japan Line의 한국대리점선사였다.
또 70년대 들어 한국에 해상운송의 컨테이너화가 상륙하면서 대리점선사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원양항로인 북미항로 취항 유일의 국적선사인 대한해운공사가 재래선 운항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미, 유럽, 호주 등 모든 원양항로의 풀 컨 서비스는 외국선사의 한국대리점선사가 컨테이너 운송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70년대 원양 정기 풀 컨 서비스를 한국에서 실시하고 있던 외국선사의 한국GSA 선사로 비중이 큰 대리점선사는 고려해운, 협성쉬핑은 월드와이드한 네트워크의 NYK, MOL 한국GSA 선사였다. 에버렛기선이라는 대리점선사가 존재했다. 에버렛기선은 북미항로 취항 APL, 유럽항로의 ScanDutch와 Nedlloyd, 그리고 호주항로의 J.Lauritzen, 중동항로의 Jahnson, 동남아 항로의 EOL 등 그야말로 월드와이드한 서비스 네트워크를 자랑, 한국의 대리점선사를 이끌고 있었다.
특히 EOL은 해방 직후 한국-동남아 원양항로에 최초로 배선한 선사로서 외국 법인인 에버렛기선은 특히 한국의 수출입 해상운송에 크게 기여한 대리점 선사이기도 했다. 당연한 결과로 적지 않은 해운 경영인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윤인석 사장, 이동혁 사장, 김천수 부사장, 이윤수 부회장, 김원창 사장, 윤귀남 상무, 최기석 상무, 최강일 상무 등이 바로 에버렛 출신들이다.
8.15 광복 후 한국의 대리점선사를 확실히 주도한 해운인은 얼마 전 타계한 왕상은 회장이다. NYK를 제외한 일본선사 대부분과 유럽선사 대부분이 왕상은 회장에 의해 한국 대리점선사 업무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70년대 한국의 컨테이너 운송이 상륙되면서 서비스 노선이 겹쳐 대다수 외국선사 GSA 업무가 다른 한국 대리점 선사로 넘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1951년부터 2016년까지 70년 동안 왕상은 회장이 설립한 협성 및 범주해운이 일본선사 MOL의 한국 대리점선사였다는 사실은 한국 외항해운사에 길이 기록될 역사이기도 했다. 이러한 대리점선사들의 한국 해운사적 또 다른 의미는 국적 원양정기선사들의 길잡이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이다. 고려해운의 북미 컨테이너 서비스는 시작이 NYK와의 공동운항 형태였다. MOL과 범주해운 역시 한국-서아프리카 정기노선에 공동운항으로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또 한진해운의 원양 풀 컨 서비스의 개시 역시 (주)한진이 세계 최초의 해상운송 컨테이너화를 실현한 미국 선사 Sea-Land와의 제휴로 부터 출발했다.
이 밖에 70년대 한국 외항 해운업의 주역이었던 대리점 선사로 극동선박, 한국해운, 범세해운, 신일해운, 신영해운, 오주해운, 아신해운 등을 빠뜨려 놓을 수 없다. 극동선박은 미국선사 USL과 Lykes, 또 범세해운은 덴마크 선사 Maersk의 한국 대리점선사였다.
그리고 신영해운은 대만선사 Evergreen, 한국해운은 미국 선사 PFEL, 오주해운은 일본선사 YSL, 신일해운은 일본선사 Showa, 아신해운은 싱가포르 국영선사 NOL의 한국대리점선사로 원양상선의 풀 컨 서비스를 한국에서 시행한 바 있다.
그런데 이 같은 한국 외항해운계의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대리점 선사 대부분이 별다른 기록 없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