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부터 일선 취재 현장에서는 멀어졌다. 그리고 10년 전 이후 필자는 사설과 칼럼 외에 일반 기사는 작성해 본 적이 드물다. 다만 출판 쪽에 관심을 집중해 평전이나 해운기업사 같은 단행본 출간을 위한 집필에 진력했다.
1
혹자는 필자의 사설이나 칼럼에 대해 “왜 70년대 해운 상황을 자주 언급하느냐”고 묻는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한국의 외항해운업 상황과 필자 개인적 처지가 결부된 요인이기도 하다.
우선은 한국 해운사 관점에서 볼 때 1970년대는 격변의 시기였다. 70년대가 시작된 1970년도에 국적선 선복량이 비로소 100만 톤을 돌파, 이후 본격적인 한국 상선대 증강이 이루어졌다. 여기에다 정기선 서비스의 컨테이너화가 한국에 상륙한 시기도 70년대 부터이다.
그것도 국적 정기선사로 컨테이너화를 이룬 선사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모두 외국의 대형 정기선사에 의해 한국발 정기선 서비스의 풀 컨테이너화가 개시되었다. 재래선과 달리 해상운송의 컨 화에는 컨테이너 터미널이 갖추어져야 하는데 이 같은 항만 건설은 단시간내에 이루어질 수가 없다.
따라서 Off-Dock CY나 소형 컨테이너 피더선에 의한 T/S 형태라는 과도기적 한국적 컨테이너 시스템이 7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76년 한국 최초의 컨테이너 터미널인 BCTOC가 개장되었다.
이 뿐 아니라 해운 행정을 전담하는 행정 조직인 해운항만청이 1976년 개청되었다. 같은 해 해상 포워딩업이 해상운송주선업이라는 명칭으로 면허제에 의한 새로운 체제가 정립되었다. 특히 70년대 한국 외항해운업은 대리점선사 주도 하에 외국선사들이 주축이 된 운임 동맹들의 막강한 파워가 넘쳐나던 시기였다.
한국항의 컨테이너 시설 미비를 기화로 차별 운임이 부과되는가 하면 NB활동, 각종 서차지 부과 등 한국 선하주 모두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시기도 70년대이다. 이에 비동맹 선사들(물론 외국 정기선사)들의 돌풍도 이 시기에 확장되곤 했다. 한 마디로 70년대 한국의 외항해운계는 격동의 과도기로서 언급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시기라는 사실이다.
2
이처럼 한국 외항해운 역사에서 중차대한 시기인 70년대에 대한 기록이 별반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다. 해운 기업의 경우만 해도 그렇게 70년대 한국 제 1의 선사였던 대한해운공사, 2위 범양전용선, 3위 조양상선 등은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못하고 이미 사라진지 오래이다.
70년대 한국의 외항해운업을 주도한 대리점선사들 중 한국 최초의 원양정기선 서비스를 실시한 에버렛기선을 비롯하여 미국 선사 다수를 취급한 극동선박, 그리고 한국해운, 범세해운, 오주해운, 우주해운, 아주해운 등 70년대 혁혁한 위세를 떨친 세방그룹의 선사들도 모두 사라지고 없다.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못한 채 말이다.
이 같은 70년대 한국 해운 기록화 부재 현상을 바라보는 필자로서는 마음이 편치 않다. 그것은 70년대를 취재하고 경험한 유일한 해운기자가 바로 필자이기 때문이다. 또 다행스럽다는 현상은 전산화의 진전으로 단어 하나만 치면 그에 연관된 내용들이 화면 위로 떠오르는 정보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이에 필자로서는 가급적 지금 70년대를 언급하는 사설이나 칼럼을 게재하면 후일 누군가가 70년대 해운 상황을 검색할 때 필자의 글이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이 같은 70년대에 대한 기록화가 가능한 또 다른 해운 매체 관계자가 있다면 필자로서도 굳이 칼럼 등을 통해 70년대를 자주 언급하는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시는 분들은 인지하고 있겠지만 현재 해운 매체를 발행하고 있거나 편집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해운기자 출신 상당수는 80년대 초·중반 필자의 손에 의해 신입 해운기자로 채용, 훈련한 인물들이다.
따라서 70-80년대에 타계, 일찍 한국 해운계를 떠난 상당수의 해운인들에 대한 회고는 필자만이 가능한 일이다. 이런 내용들을 칼럼에 게재함으로써 해운 기록화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이런 제반 상황들이 종합되어 필자의 사설・칼럼에는 70년대 사건이나 사연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게다가 이제 필자의 나이도 고희를 넘긴지 한참 되어 사람이름이 곧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드물기는 하지만 성명이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래서 아직 기억이 생생할 때 가능하면 자주 70년대 해운기업과 해운인을 언급, 활자화함으로써 기록화 진전을 이루고자 하는 바람도 있다. 이 같은 필자의 개인적인 상황 역시 칼럼의 내용에 반영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또 하나 21세기 들어와 세계적 해운 불황이 그칠 줄 모르고 지속되고 있는 작금의 사정도 필자 칼럼의 70년대 회고에 한 몫을 하고 있다. 70년대의 그 화려한 생기넘쳐나는 현상들을 상기시킴으로서 오늘의 해운 불황 고통을 조금이나마 희석시키고자 하는 바람이 있다. 이 같은 제반 사항을 감안, 필자의 70년대 언급에 보다 많은 이해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 이종옥 발행인 -
15년 전부터 일선 취재 현장에서는 멀어졌다. 그리고 10년 전 이후 필자는 사설과 칼럼 외에 일반 기사는 작성해 본 적이 드물다. 다만 출판 쪽에 관심을 집중해 평전이나 해운기업사 같은 단행본 출간을 위한 집필에 진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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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필자의 사설이나 칼럼에 대해 “왜 70년대 해운 상황을 자주 언급하느냐”고 묻는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한국의 외항해운업 상황과 필자 개인적 처지가 결부된 요인이기도 하다.
우선은 한국 해운사 관점에서 볼 때 1970년대는 격변의 시기였다. 70년대가 시작된 1970년도에 국적선 선복량이 비로소 100만 톤을 돌파, 이후 본격적인 한국 상선대 증강이 이루어졌다. 여기에다 정기선 서비스의 컨테이너화가 한국에 상륙한 시기도 70년대 부터이다.
그것도 국적 정기선사로 컨테이너화를 이룬 선사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모두 외국의 대형 정기선사에 의해 한국발 정기선 서비스의 풀 컨테이너화가 개시되었다. 재래선과 달리 해상운송의 컨 화에는 컨테이너 터미널이 갖추어져야 하는데 이 같은 항만 건설은 단시간내에 이루어질 수가 없다.
따라서 Off-Dock CY나 소형 컨테이너 피더선에 의한 T/S 형태라는 과도기적 한국적 컨테이너 시스템이 7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76년 한국 최초의 컨테이너 터미널인 BCTOC가 개장되었다.
이 뿐 아니라 해운 행정을 전담하는 행정 조직인 해운항만청이 1976년 개청되었다. 같은 해 해상 포워딩업이 해상운송주선업이라는 명칭으로 면허제에 의한 새로운 체제가 정립되었다. 특히 70년대 한국 외항해운업은 대리점선사 주도 하에 외국선사들이 주축이 된 운임 동맹들의 막강한 파워가 넘쳐나던 시기였다.
한국항의 컨테이너 시설 미비를 기화로 차별 운임이 부과되는가 하면 NB활동, 각종 서차지 부과 등 한국 선하주 모두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시기도 70년대이다. 이에 비동맹 선사들(물론 외국 정기선사)들의 돌풍도 이 시기에 확장되곤 했다. 한 마디로 70년대 한국의 외항해운계는 격동의 과도기로서 언급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시기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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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한국 외항해운 역사에서 중차대한 시기인 70년대에 대한 기록이 별반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다. 해운 기업의 경우만 해도 그렇게 70년대 한국 제 1의 선사였던 대한해운공사, 2위 범양전용선, 3위 조양상선 등은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못하고 이미 사라진지 오래이다.
70년대 한국의 외항해운업을 주도한 대리점선사들 중 한국 최초의 원양정기선 서비스를 실시한 에버렛기선을 비롯하여 미국 선사 다수를 취급한 극동선박, 그리고 한국해운, 범세해운, 오주해운, 우주해운, 아주해운 등 70년대 혁혁한 위세를 떨친 세방그룹의 선사들도 모두 사라지고 없다.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못한 채 말이다.
이 같은 70년대 한국 해운 기록화 부재 현상을 바라보는 필자로서는 마음이 편치 않다. 그것은 70년대를 취재하고 경험한 유일한 해운기자가 바로 필자이기 때문이다. 또 다행스럽다는 현상은 전산화의 진전으로 단어 하나만 치면 그에 연관된 내용들이 화면 위로 떠오르는 정보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이에 필자로서는 가급적 지금 70년대를 언급하는 사설이나 칼럼을 게재하면 후일 누군가가 70년대 해운 상황을 검색할 때 필자의 글이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이 같은 70년대에 대한 기록화가 가능한 또 다른 해운 매체 관계자가 있다면 필자로서도 굳이 칼럼 등을 통해 70년대를 자주 언급하는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시는 분들은 인지하고 있겠지만 현재 해운 매체를 발행하고 있거나 편집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해운기자 출신 상당수는 80년대 초·중반 필자의 손에 의해 신입 해운기자로 채용, 훈련한 인물들이다.
따라서 70-80년대에 타계, 일찍 한국 해운계를 떠난 상당수의 해운인들에 대한 회고는 필자만이 가능한 일이다. 이런 내용들을 칼럼에 게재함으로써 해운 기록화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이런 제반 상황들이 종합되어 필자의 사설・칼럼에는 70년대 사건이나 사연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게다가 이제 필자의 나이도 고희를 넘긴지 한참 되어 사람이름이 곧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드물기는 하지만 성명이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래서 아직 기억이 생생할 때 가능하면 자주 70년대 해운기업과 해운인을 언급, 활자화함으로써 기록화 진전을 이루고자 하는 바람도 있다. 이 같은 필자의 개인적인 상황 역시 칼럼의 내용에 반영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또 하나 21세기 들어와 세계적 해운 불황이 그칠 줄 모르고 지속되고 있는 작금의 사정도 필자 칼럼의 70년대 회고에 한 몫을 하고 있다. 70년대의 그 화려한 생기넘쳐나는 현상들을 상기시킴으로서 오늘의 해운 불황 고통을 조금이나마 희석시키고자 하는 바람이 있다. 이 같은 제반 사항을 감안, 필자의 70년대 언급에 보다 많은 이해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 이종옥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