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 해운 주간지 신입 기자로 채용된 결정적 계기가 하나 있었다. ROTC 육군 보병 중위로 갓 전역한 패기와 추진력이 당시 해운 주간지가 핵심 연재물로 간주하던 ‘선적 책임자’ 순방 시리즈 취재를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해운 주간지 경영진의 이 같은 바람을 필자는 100% 충족시켜 주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해운 주간지 독자 저변 확대와 광고주인 정기선사들에 대한 영향력 강화라는 이중의 효과까지 창출하는데 필자가 결정적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신입 기자 시절부터 해운 주간지에서의 비중이 확고해 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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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적책임자 순방을 시작으로 선적상 하주들이 겪는 애로사항의 해결책을 추구해 보는 ‘선적 춘추’는 물론이고 정기선사 탐방, 해운 경영인 인터뷰 등 각종 연재물 시리즈도 담당하면서 선하주 모두에게 폭 넓은 취재원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해운기자 2년차였던 1974년 초 신춘기획으로 한국 최초의 선하주 좌담회 개최를 기획, 이의 실현에 필자로 하여금 진력을 다해달라는 발행인 및 편집국장의 요구가 발생되었다.
전사적 프로젝트가 된 좌담회 성사를 위해 회사 차원에서 당시 원양 정기선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대리점선사의 해운단체인 선박대리점협회와 협력하기로 결정되었다. 이에 필자는 회사(남강빌딩)와 지척 간에 있는 대리점협회(백남빌딩)를 자주 드나들면서 협회 강영구 국장과 좌담회 기획 업무를 협의해 나갔다.
우선 캐리어와 쉬퍼 관계자 각 6명을 선정하고 여기에 당시 선적상 현안인 네고 업무를 담당하는 외환은행 본점 과장, 그리고 하주 단체인 KOTRA(당시는 하주협의회가 미결성) 관계자 등 총 14명을 참석시키기로 했다.
그리고 캐리어 6명 중 한 명은 당시 유일의 원양 정기 국적선사인 대한해운공사 중견 간부를 참석시키기로 확정했다. 참석자 선정은 대리점선사 실무 책임자 5명은 강영구 국장이 맡은 나머지 쉬퍼 6명과 해공, 그리고 외환은행과 KOTRA 관계자는 필자가 감당키로 했다.
주간지 측에서는 장소인 호텔을 섭외했고 편집국장은 속기사를 참석시킨 뒤 좌담회 사회는 필자에게 돌아왔다.
그런데 하주 측의 인원이 7명으로 한 명 늘어났다. 금성사의 노용악 과장이 당초 참석키로 했으나 선적 실무 담당자이 이학수 사원이 함께 참석했기 때문이다. 이학수 금성사 사원은 필자의 고교 및 ROTC 동기였다. 대학은 한국외국어대 스페인어과를 나와 금성사에 취업한 필자의 절친 이자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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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적 책임자 순방 시리즈가 순항을 거듭, 필자의 하주 취재원 반경은 나날이 넓어져만 갔다. 이에 또 다시 시도한 새로운 연재물이 ‘선적 대담’이었다. 무역 업계 선적 책임자(주로 과장급)와 해운 회사 영업부장 간 선적 업무에 관해 상호 의견을 교환하는 형태로 한번 대답에 적어도 10쪽 이상의 기사 게재가 가능해서 편집국장이 아주 선호하는 기사였다.
문제는 어떤 하주를 선정하느냐였다. 우선은 선적업무에 정통, 캐리어와의 대화에 막힘이 없는 전문가라야 합당했다. 또 매번 비슷한 주제, 예를 들어 한국·북미 항로 운송 현안 같은 동일한 주제도 피해야 하기에 분야 또는 항로별 하주 선정이 중요했다.
이 같은 조건을 구비한 하주는 몇 회 지나지 않아 모두 소진되어 필자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기노선별 주제가 끝나자 특수화물 또는 특수 운송형태별 하주를 섭외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선적대담이 성공한 케이스 중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대담자가 있다. 하주는 당시 종합상사인 쌍용에서 용선 업무를 관장하던 김덕환 과장과 뉴코리아해운에서 역시 차터링 업무를 담당하던 박광택 차장이었다. 박 차장은 필자의 동향 해운인으로 신입기자 시절부터 친밀한 사이였다.
이런 인연으로 필자의 결혼식 때 사회를 삼기물산 선적책임자인 김문수 과장이 맡아주었다. 그리고 해운인으로 참석한 분이 2명이었다. 한명은 뉴코리아해운 박광택 사원이었고 또 한 명은 역시 뉴코리아해운 김기훈 사원(현 모락스 트레이닝 회장)이었다.
삼기물산 김문수 과장은 필자의 선적 책임자 순방 첫 회 주인공이었다. 출근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부여받은 취재로 선적에 관해 전혀 문외한이어서 김문수 과장에게 솔직히 처지를 설명하고 해운 용어가 나올 때 마다 상세한 설명을 부탁했는데 참으로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이 일이 인연이 되어서 김문수 과장이 삼기물산을 사직, 독자적 무역업무(바잉오피스)시절에도 교류를 가진 바 있었다.
또 선적 대담과 관련, 기억에 남은 캐리어가 몇 명 있다. 협성해운 권영배 이사, 우성해운 홍용찬 상무 등으로 임원임에도 불구, 대립자로 나왔는데 상대 하주는 모두 부장급으로 선하주 상호간 잘 아는 사이여서 대담이 가능했었다.
무엇보다 필자는 해운의 날 KBS 특별 좌담회나 연말연시 좌담회 시 하주협의회 고광훈 국장을 반드시 참석시켜 선하주간 현안 토의가 이루어지도록 항상 노력한 바 있었다. 선하주간 교량적 역할을 감당하기 위한 방책 중 하나였다. 이 밖에도 80년대 초 한창 유행했던 해운 관련 세미나에 강사로 초빙 받아 강연을 할 때 선하주간 상호 협조가 한국 무역 진흥의 핵심적 요소임을 항상 강조한 바 있었다.
누가 필자에게 ‘일선기자 시절 가장 보람된 기사가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선하주간 소통을 위한 각종 서비스였다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종옥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