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외항해운사는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던 해 부터 시작되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1950년 1월 1일 정부 조직법에 의거한 국영해운기업 대한해운공사(해공)가 발족했기 때문이다.
1945년 광복 이후 미 군정 통치기간을 거쳐 1948년 이승만 정부가 시작되었지만 우리의 외항선은 일제가 남기고 간 소형선 수칙에 불과했다. 이 시기는 외항선보다 내항선이 더욱 강세를 보여 한국 해운을 주도한 바 있다.
그리고 해양대 1기가 1949년부터 배출되기 시작한 상황을 감안, 우리가 1세대 해운인이라고 부르는 해운인들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일제 강점기 일본의 고등상선학교를 졸업한 초대 해양대 학장을 역임한 이시형 박사를 들 수 있다. 마찬가지로 윤상송 박사, 석두옥 선장, 황부길 선장 등 해기사 출신 1세대 해운인들을 찾아볼 수 있다.
또 김용주 초대 해공 사장 같은 해운인도 1세대 해운인이라고 해도 조금의 하자가 없다. 여기에다 1951년 6.25전쟁 중 협성해운을 설립한 왕상은 회장 또한 1세대 해운인을 대표하는 분이다.
여기에 6.25전쟁 후 고려해운을 창업한 이학철 사장이나 광복 후 한일항로 취항선의 선장을 역임한 김윤석 회장, 양원석 선장 등도 1세대 해운인이라 할 수 있다. 1세대 해운인들 중 신 기장 등 해기사 출신들 자료는 비교적 많이 남아있다. 언젠가 해기사협회가 ‘선원열전’같은 단행본을 통해 1세대 해운인들의 자료들을 활자화시킨 바 있었다.
또 이시형 학장은 해양대 관련 출판물에서 기록회가 큰 진전을 이룬 바 있어 자료 또한 풍부한 편이다. 김용주 회장 역시 외교관으로 실업인 경방 창업자 등 재계 활동이 활발해서 기록들이 비교적 상세한 편이다.
이런 제반 사정을 감안할 때 해기사가 아닌 1세대 해운기업 창업자들의 기록들이나 자료들이 희소한 편이다. 이런 와중에서도 한 가지 다행스러운 바는 얼마 전 타계한 1920년생이자 1951년부터 외항해운선박 운항은 물론이고 한국 대리점 선사의 시작을 주도한 왕상은 회장의 평전이 한 권의 단행본으로 발간되어 있어 기록화의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1세대 해운인으로 남궁련 전 해공 사장 및 조선공사 그리고 극동해운 및 극동선박 창업자의 기록 부재가 참으로 아쉽다. 무엇보다 극동해운은 한국과 북미간 최초 운항된 외항선 고려호 소유 해운 기업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이 인연이 되어 운항사인 극동해운의 계열 대리점선사인 극동선박은 주요 미국 정기선 선사 대부분의 한국GSA를 맡은 바 있었다. 예를 들어 APL, USL, PFEL, Lykes 등이다.
물론 미국 선사를 제외한 일본 선사 대부분과 유럽 정기선 취항사들은 왕상은 회장의 협성해운이 한국GSA를 개시한 바 있다. 그리고 흥아해운 창업자 윤종근 회장도 평전 형태의 단행본이 기록으로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나머지 1세대 해운인, 특히 대리점선사 천우사의 창업자이자 2대 이후 여러 번 한국선박대리점협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전택보 사장에 대한 기록은 별반 남아있지 않은 형편이다.
그 중에서도 50년대 한국 외항해운의 리드선사였던 에버렛기선의 윤인석 사장이야 말로 대리점 선사 1세대 경영자를 대표하는 해운인이다. 윤인석 회장의 회고록이 어느 해운 주간지에 연재된 바 있기는 하나 여타 기록물은 찾아보기 힘든 형편이다. 게다가 윤 회장은 50-60년대 그다지 길지 않은 기간인 해운인의 삶을 영위, 기록화가 미흡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는 하다.
또 하나 아쉬운 바는 1세대 해운인이라 할 수 있는 고려해운 창업자 이학철 사장의 경우이다. 이 사장의 자료가 담긴 고려해운 자료철들이 고려해운의 북미항로 외항해운 부분이 해운합리화시 현대상선으로 합병되는 과정에서 이학철 사장의 각종 자료들이 담겨진 캐비닛이 현대상선으로 잘못 이송되는 바람에 이 사장의 자료들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1세대 해운인들의 자료가 제대로 보관되지 못하고 폐기, 또는 멸실된 경우가 허다하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자료나 기록들에 대한 관심 부족이 가져온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같은 한국 해운의 기록 문화 관심 부재 현상은 하루 바삐 해소되어야 함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