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이면 무역운송신문이 창간 39주년을 맞이한다. 보통 이런 제목의 경우, 매체 발행인이 ‘발행인의 글’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독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곤 한다. 본지 역시 이종옥 발행인이 매년 10월 마다 동일한 제목의 칼럼을 게재하며 변함없이 본지를 아껴준 독자와 광고주들에게 감사를 표한 바 있다. 그러나 올해 창간 기념일을 맞이하면서는 부장인 필자가 평소 칼럼을 적는 포맷인 ‘노트북을 열며’ 코너를 통해 감사의 글을 남기고자 한다. 그 이유는 이제 창간 40주년을 맞는 오는 2024년부터는 필자가 국장이 되어, 무역운송신문의 발행인으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39년 동안 성원해 주신 독자들에게 감사드리는 마음과 함께, 필자가 기자 생활을 처음 시작한 지난 2006년부터 지금까지 도와주신 모든 분, 아울러 앞으로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지만 필자의 국장 겸 발행인의 삶에 함께 해 줄 수많은 분들에게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를 드리고자 창간 기념 칼럼을 쓰게 되었다.
무역운송신문의 역사는 지난 1984년 항공화물 전문잡지인 ‘월간 무역운송’에서 부터 시작한다. 당시만 해도 전문지는 등록제가 아닌 허가제여서 창간을 위해서는 많은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 당시 정계 쪽에 인맥이 있던 서인곤 씨가 코리아쉬핑가제트의 임원이었던 본지 이종옥 사장의 도움을 받아 월간 잡지 무역운송을 창간했다. 그리고 오랜 기간 국내 굴지의 항공화물 전문 매체로 이름을 남겼다. 무역운송을 통해 배출한 전문 언론인도 상당수이며, 이들 중 현재 해운 전문지 기자단에서 필자와 함께 활동하고 있는 언론인도 있다. 무역운송이 해운 전문 언론으로 자리매김 한건 본지 이종옥 사장이 발행인이 된 지난 1990년대 초반부터 이다. 코리아쉬핑가제트와 해운무역, 해사신문을 거치며, 해운 전문 언론계에 많은 족적을 남긴 바 있는 본지 이종옥 발행인은 80년대 후반 무역운송의 편집 주간으로 부임한 뒤, 월간 무역운송을 항공화물을 넘어 항공과 해운을 넘나드는 물류 전문지로 성장시켰다. 그리고 무역운송의 발행인이 된 이후부터는 항공 30%, 해운 70% 정도의 비율로 해운의 기사 분량을 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90년대 후반 제호를 ‘무역운송신문’으로 바꾸고 현재의 신문 형태의 주간지로 바꾸고 난 뒤 부터는 해운과 항만, 해운 정책들의 기사를 주로 게재하는 정통 해운 전문지로 완전히 자리매김 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필자의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무역운송신문이 창간 22주년을 맞이했던 지난 2006년, 필자는 모 대학 정보통신공학부를 졸업했다. 그것도 9학기 만에 정말 힘들게 졸업을 했다. 졸업이 쉽지 않았을 만큼, 필자는 공대와는 거리가 멀었던 두뇌 구조를 가졌던 거 같다. 하지만 당시 언론계에 종사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반드시 이공대를 나와야 안정적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에 필자는 재수를 거치면서까지 이공대에 진학하려 했다. 재수를 하고 입시를 치렀던 1998년 겨울 수학능력시험에서 필자는 국어와 사회과학은 거의 만점을 받았다. 그러나 수학은 겨우 반타작에 성공했고, 과학 분야 역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영어는 그냥 어느 정도만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이런 수능 성적만 놓고 봐도 지극히 문과적인 두뇌구조를 가진 필자였지만, 아버지 영향 때문인지 이공대에만 지원했고, 기적적으로 개강을 일주일 남긴 2월 말 어느 날 합격통지를 받아 모 수도권 대학 정보통신공학부에 입학했다. 입학은 했으나 성적이 좋을 리 만무했다. 신기한건 교양으로 선택한 과목, 특히 언어에 관계된 수업은 A+나 A학점을 놓친 기억이 없다. 그러나 전공은 대부분 B학점 이하였고, 심지어 C나 D학점 등으로 겨우 패스한 전공과목도 상당수였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졸업을 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이런 나쁜 성적이었지만, 필자는 참으로 즐거운 대학 시절을 보냈다. 그것은 필자가 활동한 동아리 때문이다. 모태신앙이었지만 교회만 다니던 필자는, 재수 시절 재수학원 기독학생 모임에 나가면서 본격적인 기독교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종교적 문장으로 표현하면,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입학과 동시에 기독교 동아리에 들어가서 신앙 훈련과 음악 전도 활동에 뛰어들었다. 특히 노래와 악기 연주, 말솜씨 등에 재능이 있던 필자는 그 능력에 신앙을 덧붙여 목회자라는 직업에 관심이 생겼고, 필자의 재능을 알아본 주변의 설득으로 졸업 후 신학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찬양 전문 목회자가 되려는 계획을 가지게 되었다. 그 꿈을 가지고 군 입대를 하고, 전역 이후 부터는 전공보다는 신학대학원을 진학을 위한 준비에 몰두했다. 그렇게 학부 시절을 보내면서, 전공 성적은 처참했지만 나름대로 신대원 진학이라는 목표가 있다 보니,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준비는 철저히 해나갔다. 다니던 교회에서도 신대원 진학만 이뤄지면 나름대로 목회자의 과정을 밟는데 도움을 주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하지만 필자는 목회자가 될 운명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학부를 졸업할 그 해에 갑작스레 어머니께서 지병으로 돌아가셨고, 홀로된 아버지를 필자가 도와야 할 상황이 발생해 버렸다. 마침 다니던 교회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겨, 필자가 그 교회를 통해 목회자의 과정을 밟을 수 있는 상황은 불가능해졌다. 이래저래 신학대학원 진학이 어려워지는 과정 속에서 필자는 9학기 만에 겨우 졸업은 했지만, 결국 신학대학원 진학은 포기하기로 결론을 지었다.
신학의 길 아닌 어떤 미래로 설계하지 않았던 필자는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나 고민하면서 평소 관심 있던 방송 아카데미 등등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공이 아니었기에 그 길을 간다는 게 그리 만만치는 않았고, 결국 검색만 하면서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졸업 후 며칠간을 그렇게 방황하던 어느 날, 필자의 아버지께서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내용은 딱 6개월만 당신이 경영하는 해운 전문 매체에서 기자생활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많이도 말고 딱 6개월만 기자 생활을 해 보고, 이 길이 아니다 싶으면 그 때 다른 길을 가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당신도 전문지 경영을 중단하고 고향인 대구로 내려가겠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경영상의 어려움이 컸던 아버지의 나름대로 배수의 진이었던 것 같다. 필자는 사실 그 당시만 해도 기자는 생각도 해 본적이 없다. 아버지가 이공대를 가라고 권했던 것과 별개로도, 그가 해운 전문지를 경영하면서 얼마나 힘들게 사셨는지를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렇게 강단이 센 아버지도 어려워했던 기자의 삶을, 나름 평화주의자이고 노는 거 좋아하며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사고를 가진, 요즘 유행하는 MBTI 엣프피(ESFP)의 필자가 감당한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래서인가 졸업 후 어떤 직종으로 갈지 고민하면서도 기자라는 영역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기자를, 그것도 당시 정말 어렵게 운영을 이어가던 해운 전문지에서의 기자를 제안하시니 솔직히 많이 어이없었다. 하지만 그 당시 딱히 어떤 영역에 대해 확신도 없고 준비도 하지 않았던 필자로서는 그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필자는 바로 ‘무역운송신문 이일우 기자’라는 명함을 파고 아버지가 추천한 곳으로 인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호황을 누리던 정기선 및 부정기선 국적 선사를 중심으로 다녔던 기억이 난다. 물론 어디를 가든지 결코 만만치는 않았다.
(다음 회에 계속)
- 이일우 부장 -
10월이면 무역운송신문이 창간 39주년을 맞이한다. 보통 이런 제목의 경우, 매체 발행인이 ‘발행인의 글’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독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곤 한다. 본지 역시 이종옥 발행인이 매년 10월 마다 동일한 제목의 칼럼을 게재하며 변함없이 본지를 아껴준 독자와 광고주들에게 감사를 표한 바 있다. 그러나 올해 창간 기념일을 맞이하면서는 부장인 필자가 평소 칼럼을 적는 포맷인 ‘노트북을 열며’ 코너를 통해 감사의 글을 남기고자 한다. 그 이유는 이제 창간 40주년을 맞는 오는 2024년부터는 필자가 국장이 되어, 무역운송신문의 발행인으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39년 동안 성원해 주신 독자들에게 감사드리는 마음과 함께, 필자가 기자 생활을 처음 시작한 지난 2006년부터 지금까지 도와주신 모든 분, 아울러 앞으로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지만 필자의 국장 겸 발행인의 삶에 함께 해 줄 수많은 분들에게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를 드리고자 창간 기념 칼럼을 쓰게 되었다.
무역운송신문의 역사는 지난 1984년 항공화물 전문잡지인 ‘월간 무역운송’에서 부터 시작한다. 당시만 해도 전문지는 등록제가 아닌 허가제여서 창간을 위해서는 많은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 당시 정계 쪽에 인맥이 있던 서인곤 씨가 코리아쉬핑가제트의 임원이었던 본지 이종옥 사장의 도움을 받아 월간 잡지 무역운송을 창간했다. 그리고 오랜 기간 국내 굴지의 항공화물 전문 매체로 이름을 남겼다. 무역운송을 통해 배출한 전문 언론인도 상당수이며, 이들 중 현재 해운 전문지 기자단에서 필자와 함께 활동하고 있는 언론인도 있다. 무역운송이 해운 전문 언론으로 자리매김 한건 본지 이종옥 사장이 발행인이 된 지난 1990년대 초반부터 이다. 코리아쉬핑가제트와 해운무역, 해사신문을 거치며, 해운 전문 언론계에 많은 족적을 남긴 바 있는 본지 이종옥 발행인은 80년대 후반 무역운송의 편집 주간으로 부임한 뒤, 월간 무역운송을 항공화물을 넘어 항공과 해운을 넘나드는 물류 전문지로 성장시켰다. 그리고 무역운송의 발행인이 된 이후부터는 항공 30%, 해운 70% 정도의 비율로 해운의 기사 분량을 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90년대 후반 제호를 ‘무역운송신문’으로 바꾸고 현재의 신문 형태의 주간지로 바꾸고 난 뒤 부터는 해운과 항만, 해운 정책들의 기사를 주로 게재하는 정통 해운 전문지로 완전히 자리매김 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필자의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무역운송신문이 창간 22주년을 맞이했던 지난 2006년, 필자는 모 대학 정보통신공학부를 졸업했다. 그것도 9학기 만에 정말 힘들게 졸업을 했다. 졸업이 쉽지 않았을 만큼, 필자는 공대와는 거리가 멀었던 두뇌 구조를 가졌던 거 같다. 하지만 당시 언론계에 종사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반드시 이공대를 나와야 안정적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에 필자는 재수를 거치면서까지 이공대에 진학하려 했다. 재수를 하고 입시를 치렀던 1998년 겨울 수학능력시험에서 필자는 국어와 사회과학은 거의 만점을 받았다. 그러나 수학은 겨우 반타작에 성공했고, 과학 분야 역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영어는 그냥 어느 정도만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이런 수능 성적만 놓고 봐도 지극히 문과적인 두뇌구조를 가진 필자였지만, 아버지 영향 때문인지 이공대에만 지원했고, 기적적으로 개강을 일주일 남긴 2월 말 어느 날 합격통지를 받아 모 수도권 대학 정보통신공학부에 입학했다. 입학은 했으나 성적이 좋을 리 만무했다. 신기한건 교양으로 선택한 과목, 특히 언어에 관계된 수업은 A+나 A학점을 놓친 기억이 없다. 그러나 전공은 대부분 B학점 이하였고, 심지어 C나 D학점 등으로 겨우 패스한 전공과목도 상당수였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졸업을 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이런 나쁜 성적이었지만, 필자는 참으로 즐거운 대학 시절을 보냈다. 그것은 필자가 활동한 동아리 때문이다. 모태신앙이었지만 교회만 다니던 필자는, 재수 시절 재수학원 기독학생 모임에 나가면서 본격적인 기독교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종교적 문장으로 표현하면,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입학과 동시에 기독교 동아리에 들어가서 신앙 훈련과 음악 전도 활동에 뛰어들었다. 특히 노래와 악기 연주, 말솜씨 등에 재능이 있던 필자는 그 능력에 신앙을 덧붙여 목회자라는 직업에 관심이 생겼고, 필자의 재능을 알아본 주변의 설득으로 졸업 후 신학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찬양 전문 목회자가 되려는 계획을 가지게 되었다. 그 꿈을 가지고 군 입대를 하고, 전역 이후 부터는 전공보다는 신학대학원을 진학을 위한 준비에 몰두했다. 그렇게 학부 시절을 보내면서, 전공 성적은 처참했지만 나름대로 신대원 진학이라는 목표가 있다 보니,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준비는 철저히 해나갔다. 다니던 교회에서도 신대원 진학만 이뤄지면 나름대로 목회자의 과정을 밟는데 도움을 주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하지만 필자는 목회자가 될 운명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학부를 졸업할 그 해에 갑작스레 어머니께서 지병으로 돌아가셨고, 홀로된 아버지를 필자가 도와야 할 상황이 발생해 버렸다. 마침 다니던 교회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겨, 필자가 그 교회를 통해 목회자의 과정을 밟을 수 있는 상황은 불가능해졌다. 이래저래 신학대학원 진학이 어려워지는 과정 속에서 필자는 9학기 만에 겨우 졸업은 했지만, 결국 신학대학원 진학은 포기하기로 결론을 지었다.
신학의 길 아닌 어떤 미래로 설계하지 않았던 필자는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나 고민하면서 평소 관심 있던 방송 아카데미 등등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공이 아니었기에 그 길을 간다는 게 그리 만만치는 않았고, 결국 검색만 하면서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졸업 후 며칠간을 그렇게 방황하던 어느 날, 필자의 아버지께서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내용은 딱 6개월만 당신이 경영하는 해운 전문 매체에서 기자생활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많이도 말고 딱 6개월만 기자 생활을 해 보고, 이 길이 아니다 싶으면 그 때 다른 길을 가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당신도 전문지 경영을 중단하고 고향인 대구로 내려가겠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경영상의 어려움이 컸던 아버지의 나름대로 배수의 진이었던 것 같다. 필자는 사실 그 당시만 해도 기자는 생각도 해 본적이 없다. 아버지가 이공대를 가라고 권했던 것과 별개로도, 그가 해운 전문지를 경영하면서 얼마나 힘들게 사셨는지를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렇게 강단이 센 아버지도 어려워했던 기자의 삶을, 나름 평화주의자이고 노는 거 좋아하며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사고를 가진, 요즘 유행하는 MBTI 엣프피(ESFP)의 필자가 감당한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래서인가 졸업 후 어떤 직종으로 갈지 고민하면서도 기자라는 영역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기자를, 그것도 당시 정말 어렵게 운영을 이어가던 해운 전문지에서의 기자를 제안하시니 솔직히 많이 어이없었다. 하지만 그 당시 딱히 어떤 영역에 대해 확신도 없고 준비도 하지 않았던 필자로서는 그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필자는 바로 ‘무역운송신문 이일우 기자’라는 명함을 파고 아버지가 추천한 곳으로 인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호황을 누리던 정기선 및 부정기선 국적 선사를 중심으로 다녔던 기억이 난다. 물론 어디를 가든지 결코 만만치는 않았다.
(다음 회에 계속)
- 이일우 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