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해운 주간지 대표이사 직을 내던지고 새로운 신생 해운 주간지 공동 사주로 동업을 시사하자, 한국 최초의 해운 주간지 사주는 능력은 부족하지만 그나마 남아 있는 임원이 K이사 뿐이라 여러 임무를 맡겼으나 마음에 들리는 만무했다.
그리고 사주는 K이사를 자신의 스트레스 해소용 직원으로 활용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기안을 가져오면 재떨이를 K이사를 향해 던졌다. 물론 맞히려는 의도보다 겁주기 위해서였고, 이에 K이사는 싹싹 빌면서 용서를 구했다. 그제서야 발행인은 노기를 멈추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보니 K이사는 협운해운의 J사장에게 스트레스로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소연할 정도였다.
1
하지만 K이사는 거짓말을 아주 잘했다. 특히 필자가 떠난 뒤 기자들은 물론이고 여타 부서 직원들에게 까지 필자가 자신과의 경쟁에서 밀려나갔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하곤 했다. 그리고 이런 K이사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듣고 믿었던 A라는 기자가 있었다. (참고로 A기자는 필자와 같은 해운 주간지에서 몸담은 적은 없었다.) K이사가 어떻게 과거의 사실을 왜곡하여 설명했는지 모르지만, A기자는 필자와 K이사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가진 채 해운 주간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문제는 시간이 한참 지나 A기자가 해운 주간지에서 퇴사하고 독립한 뒤 지금 현직에서 활동중인 필자의 아들을 만나게 된 일이다. A기자가 필자의 아들과 함께 취재하던 중 필자의 해운 주간지 시절 얘기가 나오자, A기자는 필자와 K이사가 해운 주간지에서 라이벌 관계였다는 표현을 했다고 한다. 나름 K이사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던 필자의 아들은 그 얘기를 필자에게 전해주었고 필자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기사를 못써서 자진해서 영업부로 도망치듯 부서를 옮겼고 임원이 된 후에는 사주에게 재떨이 맞는 수모마저 겪었던, 그나마 아내의 강한 내조로 겨우 회사에서 잘리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인물이 한 때 해운 주간지 대표이사 사장으로 근무했던 필자와 라이벌 관계였다고 말하고 다녔다니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고 K이사가 필자의 퇴사 후 기자들에게 필자에 대해 어떻게 왜곡하고 다녔는지에 대해서도 나름 짐작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어떻든 필자는 아들에게 다시금 당시 상황을 차근차근 설명했고, 그 내용은 얼마 뒤 A기자에게 전달되었다. 아들의 전언으로는 그 이후 A기자에게서 그 당시와 관련한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2
이렇게 필자 후배로 편집국 기자로 입사한 뒤 능력 부족으로 갖은 고초를 겪고 영업부로 건너간, 그리고 필자 퇴사 후 헛소문을 사실인양 말하고 다녔던 것으로 추정되는 K이사에 대한 언급은 이만 줄인다. 그리고 이번에는 손 기자와의 사연을 회고해 볼 까 한다. 반 세기에 가까운 해운 매체 생활 중 후배 기자로 필자 밑에서 기사 작성을 배우고 해운 용어를 익힌 해운 기자들은 수도 없이 많다. 이 중 기사 작성이나 해운 및 무역업계 취재, 그리고 외신 번역에 탁월한 솜씨를 보인 해운 기자들도 상당수에 달한다. 예를 들어 장석춘 기자, 이인애 기자, 또 지금 언급하고자 하는 손 기자가 있다.
손 기자는 고려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뒤 어느 국책 연구소에서 근무하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해운 주간지에 입사했다. 통계자료 몇 건만 주면 제법 그럴듯한 기획 기사를 작성하는 남다른 솜씨가 있었다. 연구소 출신다운 면모였다. 그러다 돌연 사직했는데 얼마 후 또 다른 스케줄 및 해운 기사를 게재하는 해운 주간지에 편집국장 부재의 편집 부장으로 편집부 최고 책임자 자리를 맡은 것이다. 그리고 손 부장 밑에서 기자 생활을 한 친구가 몇 해 전 작고한 J기자였다.
잠시 J기자를 설명하면, J기자는 필자가 공동 대주주로 운영하던 신생 해운 주간지에서 친구인 L사장으로 부터 기묘한 수법에 의해 50% 주식을 탈취당하고 쫓겨난 뒤 새로이 피고용인 생활을 시작했던 H신문에서 편집국장을 하던 시절 필자 밑에 해운 기자로 근무한 바 있다. 그리 오랜 기간 함께 근무한건 아니지만, 필자의 아들 전언에 의하면 J기자는 H신문 당시 필자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필자의 아들에게 여러번 전했다고 한다. 아울러, 본인 역시 독립하기전 떠밀리듯 퇴사했던 경험을 얘기하면서, 필자가 친구인 L사장에게 배신당했던 것처럼 자신도 억울한 일을 당했고 그래서 필자의 마음을 누구보다 이해한다는 말을 필자의 아들에게 종종 언급했다는 얘기 또한 들은 바 있다.
3
다시 손 기자 얘기로 돌아와서, 손 기자와의 가장 뚜렷한 기억은 필자가 편집이사 겸 편집국장 시절 인천에 입항한 호화유람선 승선 취재 당시의 일이다. 승선 행사에 초대받은 뒤 필자는 J기자(당시 차장이었다.)를 대동하고 필자의 기사 딸린 출퇴근 및 업무용 차량으로 인천에 갔는데, 그 자리에서 손 기자를 만났다. J기자와 손 기자는 그 때 처음 대면한 셈이다. 함께 취재를 한 뒤, 돌아오는 길에 손 부장이 필자 차에 함께 타고 싶다고 요청하기에 이를 허락하여 함께 귀경한 적이 있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손 기자는 해운계를 떠났고 더 이상 만나지는 못했다.
손 기자 다음으로 입사한 후배 기자로 정 기자가 있었다. 연세대 출신으로 영어에 능통해서 외신 번역과 취재를 겸했고 필자에게도 매우 신임을 받았던 기자였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정 기자가 외국 여성과 교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결혼까지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역시 박봉을 견디지 못해 퇴사했고, 그 이후의 소식은 알 수 없었다.
- 이종옥 발행인 -
필자가 해운 주간지 대표이사 직을 내던지고 새로운 신생 해운 주간지 공동 사주로 동업을 시사하자, 한국 최초의 해운 주간지 사주는 능력은 부족하지만 그나마 남아 있는 임원이 K이사 뿐이라 여러 임무를 맡겼으나 마음에 들리는 만무했다.
그리고 사주는 K이사를 자신의 스트레스 해소용 직원으로 활용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기안을 가져오면 재떨이를 K이사를 향해 던졌다. 물론 맞히려는 의도보다 겁주기 위해서였고, 이에 K이사는 싹싹 빌면서 용서를 구했다. 그제서야 발행인은 노기를 멈추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보니 K이사는 협운해운의 J사장에게 스트레스로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소연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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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K이사는 거짓말을 아주 잘했다. 특히 필자가 떠난 뒤 기자들은 물론이고 여타 부서 직원들에게 까지 필자가 자신과의 경쟁에서 밀려나갔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하곤 했다. 그리고 이런 K이사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듣고 믿었던 A라는 기자가 있었다. (참고로 A기자는 필자와 같은 해운 주간지에서 몸담은 적은 없었다.) K이사가 어떻게 과거의 사실을 왜곡하여 설명했는지 모르지만, A기자는 필자와 K이사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가진 채 해운 주간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문제는 시간이 한참 지나 A기자가 해운 주간지에서 퇴사하고 독립한 뒤 지금 현직에서 활동중인 필자의 아들을 만나게 된 일이다. A기자가 필자의 아들과 함께 취재하던 중 필자의 해운 주간지 시절 얘기가 나오자, A기자는 필자와 K이사가 해운 주간지에서 라이벌 관계였다는 표현을 했다고 한다. 나름 K이사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던 필자의 아들은 그 얘기를 필자에게 전해주었고 필자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기사를 못써서 자진해서 영업부로 도망치듯 부서를 옮겼고 임원이 된 후에는 사주에게 재떨이 맞는 수모마저 겪었던, 그나마 아내의 강한 내조로 겨우 회사에서 잘리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인물이 한 때 해운 주간지 대표이사 사장으로 근무했던 필자와 라이벌 관계였다고 말하고 다녔다니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고 K이사가 필자의 퇴사 후 기자들에게 필자에 대해 어떻게 왜곡하고 다녔는지에 대해서도 나름 짐작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어떻든 필자는 아들에게 다시금 당시 상황을 차근차근 설명했고, 그 내용은 얼마 뒤 A기자에게 전달되었다. 아들의 전언으로는 그 이후 A기자에게서 그 당시와 관련한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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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필자 후배로 편집국 기자로 입사한 뒤 능력 부족으로 갖은 고초를 겪고 영업부로 건너간, 그리고 필자 퇴사 후 헛소문을 사실인양 말하고 다녔던 것으로 추정되는 K이사에 대한 언급은 이만 줄인다. 그리고 이번에는 손 기자와의 사연을 회고해 볼 까 한다. 반 세기에 가까운 해운 매체 생활 중 후배 기자로 필자 밑에서 기사 작성을 배우고 해운 용어를 익힌 해운 기자들은 수도 없이 많다. 이 중 기사 작성이나 해운 및 무역업계 취재, 그리고 외신 번역에 탁월한 솜씨를 보인 해운 기자들도 상당수에 달한다. 예를 들어 장석춘 기자, 이인애 기자, 또 지금 언급하고자 하는 손 기자가 있다.
손 기자는 고려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뒤 어느 국책 연구소에서 근무하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해운 주간지에 입사했다. 통계자료 몇 건만 주면 제법 그럴듯한 기획 기사를 작성하는 남다른 솜씨가 있었다. 연구소 출신다운 면모였다. 그러다 돌연 사직했는데 얼마 후 또 다른 스케줄 및 해운 기사를 게재하는 해운 주간지에 편집국장 부재의 편집 부장으로 편집부 최고 책임자 자리를 맡은 것이다. 그리고 손 부장 밑에서 기자 생활을 한 친구가 몇 해 전 작고한 J기자였다.
잠시 J기자를 설명하면, J기자는 필자가 공동 대주주로 운영하던 신생 해운 주간지에서 친구인 L사장으로 부터 기묘한 수법에 의해 50% 주식을 탈취당하고 쫓겨난 뒤 새로이 피고용인 생활을 시작했던 H신문에서 편집국장을 하던 시절 필자 밑에 해운 기자로 근무한 바 있다. 그리 오랜 기간 함께 근무한건 아니지만, 필자의 아들 전언에 의하면 J기자는 H신문 당시 필자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필자의 아들에게 여러번 전했다고 한다. 아울러, 본인 역시 독립하기전 떠밀리듯 퇴사했던 경험을 얘기하면서, 필자가 친구인 L사장에게 배신당했던 것처럼 자신도 억울한 일을 당했고 그래서 필자의 마음을 누구보다 이해한다는 말을 필자의 아들에게 종종 언급했다는 얘기 또한 들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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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손 기자 얘기로 돌아와서, 손 기자와의 가장 뚜렷한 기억은 필자가 편집이사 겸 편집국장 시절 인천에 입항한 호화유람선 승선 취재 당시의 일이다. 승선 행사에 초대받은 뒤 필자는 J기자(당시 차장이었다.)를 대동하고 필자의 기사 딸린 출퇴근 및 업무용 차량으로 인천에 갔는데, 그 자리에서 손 기자를 만났다. J기자와 손 기자는 그 때 처음 대면한 셈이다. 함께 취재를 한 뒤, 돌아오는 길에 손 부장이 필자 차에 함께 타고 싶다고 요청하기에 이를 허락하여 함께 귀경한 적이 있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손 기자는 해운계를 떠났고 더 이상 만나지는 못했다.
손 기자 다음으로 입사한 후배 기자로 정 기자가 있었다. 연세대 출신으로 영어에 능통해서 외신 번역과 취재를 겸했고 필자에게도 매우 신임을 받았던 기자였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정 기자가 외국 여성과 교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결혼까지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역시 박봉을 견디지 못해 퇴사했고, 그 이후의 소식은 알 수 없었다.
- 이종옥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