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38주년 특집 / 해운기자 50년의 뒷이야기(3)

취재부
2022-11-23

KBS와의 특별한 사연


1981년 1월 1일부로 편집차장 1년 만에 편집부장으로 승진했다. 편집국장 부재여서 실질적으로 편집국장 업무를 수행했다. 이에 따른 보상으로 발행인 사주는 운전기사가 딸린 출퇴근 및 업무용 자가용을 배정해 주었다. 같은 날짜로 부장 승진한 사주의 6촌 동생인 총무부 L부장은 차량을 제공받지 못해 불만이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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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독점체제를 유지하던 한국 최초의 해운 주간지는 80년에 들어 경쟁 주간지가 등장, 이에 따른 대비로 해운 관련 출판물 발간에 전사적 지원을 경주하고 있었다. 첫 번째 단행본인 해운용어해설을 발간한데 이어 해사연감을 국내 최초로 기획·발간하고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 모든 출판물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필자로서는 그야말로 전쟁과 같은 업무 폭주에 시달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새로운 큰 영역의 진입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KBS 제2라디오의 ‘저녁의 792’프로의 PD가 연락을 취해 온 것이다. 이응모 PD로 기억되는데 후일 KBS부사장까지 역임한 실력파로 동아방송 출신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방송 통폐합 조치를 시행, TBC TV(동양방송)는 KBS 제2TV로, 그리고 동아방송은 KBS 제2라디오로 전격 통합되어 버렸다.

동아방송은 동아일보 계열사로 교통 분야의 여러 프로를 방송하여 큰 인기를 얻은 바 있었다. 이에 동아방송 출신 이PD는 KBS 제2라디오의 ‘저녁의 792’프로를 맡은 후 한국 최초로 해상교통에 관련된 프로를 런칭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해운계 지인을 통해 한국 최초의 해운기자인 필자의 얘기를 듣고 직접 연락을 취해왔다. 정중하게 KBS로 나와 주시면 고맙겠다는 요청이었다. 해운에 관련된 프로를 신설하고 싶어 연락을 드렸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이에 필자는 이PD를 만나기 위해 KBS로 찾아갔다.

경력자로 선임인 이PD와 젊은 PD와 필자, 이렇게 3명이 의논한 결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해운계 소식을, 그리고 일요일에는 해운 해설을 필자 음성으로 방송하기로 했다. 시간은 6-7분 정도이고 이어 여기자 한 명을 선정, 부산항과 인천항을 입출항하는 원양 정기선의 입출항 일정을 방송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저녁의 792’가 해운 방송에 뒤이어 대중교통을 위한 도로 사정 등을 방송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하기 위해서였다. 

저녁 7시부터 시작되는 이 프로는 교통방송이 없던 당시 버스 기사나 택시 기사들이 도로교통 정보를 위해 동시간대에 거의 대부분 듣고 있던 인기 방송이었다. 이 프로의 시작을 해운의 해상운송이 담당, 그것도 필자와 필자가 데리고 있는 여기자가 맡기로 한 것이다.

특히 발행인은 회사의 홍보와 비중이 저절로 높아진다고 아주 좋아했다. 그리고 실제 방송이 개시되자 퇴근 시 대중교통을 이용하던 해운인들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이 몰려왔다. 어느 해운회사를 가더라도 해운계 소식과 해설을 방송하는 필자에게 큰 환영을 보여주었다. 해운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인식 제고에 크나큰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며 모두들 축하와 감사를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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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KBS에 가기는 불가능하여 KBS측이 필자가 80년도에 역시 개설한 국내 해운계 최초의 해운자료실이 위치한 빌딩의 지하실에 방송용 전화기로 설치해 주었다.

그리고 매일 오후 3시경 전화로 미리 녹음을 한 뒤 이를 편집, 저녁 7시 ‘저녁의 792’ 방송 선두 코너로 방송하는 체제를 갖추었다. 그리고 일요일의 해운 해설과 입출항 스케줄 방송은 토요일 오전에 녹음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필자는 스케줄 방송 여기자로 명문대 출신의 K기자를 지목, 방송을 시작했다. 발행인 지인의 자녀로 낙하산 기자였으나 음성이 유난히 밝고 성격도 좋고 또 필자의 지시를 충실하게 이행하는 여기자여서 주저 없이 선택했다.

그런데 방송을 시작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PD가 K기자 음성에 비음이 자주 튀어나와 도저히 방송으로 내보낼 수 없다며 얼마 뒤 교체를 정중히 요청해 왔다. 이에 필자는 대학 후배이기도 한 S기자를 다시 선정, KBS의 확인을 받은 결과 방송에 적합하다는 통보를 해와 이후부터는 S기자와 함께 방송했다.

1981년 10월부터 1982년 9월까지 만 1년 동안 365일 지속적으로 방송하다보니 필자에게는 또 다른 방송 요청이 쇄도하게 되었다. 우선 3월 15일 해운의 날 특집 방송의 사회를 맡게 된 것이다.

이 프로는 필자 외에 그 당시 해운업체 및 관련 단체, 그리고 해운항만청 해운국장 등 매년 3명이 출연하여 1시간이나 긴 시간을 해운 관련 현안을 토론하는 방식이었다.

또 하나 연말연시가 되면 신년도 해운 특별 좌담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역시 사회는 필자가 맡고 출연자 선정 역시 KBS 제2라디오에서 필자에게 일임했다. 이런 방송 출연은 ‘저녁의 792’ 방송이 끝난 후에도 계속되어 8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이 뿐 아니라 KBS 제1라디오는 물론이고 KBS 제1TV의 저녁 9시 뉴스에서도 해운계 관련 이슈, 예를 들어 해난 사고나 외국의 호화유람선 입항 같은 뉴스가 있으면 해운에 대한 코멘트르를 하는 단골 출연자가 되었다.

그러나 1986년 필자가 해운 주간지 대표이사 사장이 되면서 KBS의 출연은 종료되었다. 직책 때문에 방송 출연은 무리라고 판단한 필자가 KBS에 설명하고 필자를 대신할 기자 몇 명을 추천했으나 KBS 측은 정중히 거절, 더 이상 필자와 KBS와의 특별한 인연은 이어지지 못했다.


- 이종옥 발행인 -


▲KBS제1TV에 출연 중인 필자의 모습


▲해운의 날 특별 좌담회 모습. 가운데가 필자, 왼쪽이 박효원 조양에이전시 사장, 오른쪽이 한바다해운 사장 시절의 배병태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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