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38주년 특집 / 해운기자 50년의 뒷이야기(2)

취재부
2022-11-02

해운 서적 발간의 전말(1)


십 여 년 동안 경쟁자 없이 독야청청을 누렸던 한국 최초의 해운 주간지에 비상이 걸렸다. 십 년 만의 동일한 입출항 스케줄 해운 주간지가 등록을 마쳐 해운계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 소속 해운 주간지 발행인은 80년 설날에 간부 전원을 자택으로 초청, 저녁 식사를 한 뒤 대책 회의를 열기 위해서였다. 참석자는 정병모 주간(편집국장), 편집차장인 필자, 총무 및 경리 담당 이수학 차장, 그리고 영업부 김상수 대리였다. 정 국장은 발행인의 고교 동기동창이고 이수학 차장은 발행인의 6촌 동생, 그리고 김 대리는 발행인의 낙하산으로 최초 편집국 기자로 필자의 직속 후배였으나 기사 작성에 전혀 능력을 발휘 못해 스스로 자청해서 영업부로 내려간 인물이다. 발행인과 특수 관계가 아닌 간부는 공채 기자 출신인 필자뿐이었다.

그리고 해운계 내막과 상황을 아는 사람도 필자뿐이었다. 자연스레 필자의 단독 발표회 같은 대책 회의가 이어졌다. 필자는 우선 그동안 10여 년의 경험과 노하우를 살려 수익성 높은 해운 관련 서적 발간을 제의했다. 우선 필자가 10여 년 동안 연재 등을 통해 원고를 축적해 놓은 해운 용어에 대한 해설집 발간이 첫째 목표였다. 그리고 해운·조선 및 관련 산업을 망라한 해사 연감 발행이 그 두 번째 대안이었다. 모두 한국 해운 사상 최초의 시도로서 해운업체에 미칠 파급효과가 상당하리라는 필자의 판단도 아울러 강조했다.

무엇보다 그동안 독점 주간지라는 해운업계의 따가운 눈총을 해소하는데도 한 몫을 단단히 할 수 있다는 진단도 필자는 확신했다. 발행인은 대찬성, 그 자리에서 실행을 결정했다. 발행인으로서는 수익성도 보장된다는 사실이 그렇게도 만족스러울 수 없음을 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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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해운 기자 생활을 시작한 1970년대 초에는 한국 외항해운계가 격동의 전환점을 맞고 있던 시기였다. 정기선이 풀 컨테이너선 운항이 한국에도 본격적으로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급증하는 수출 해상 물동량을 운송할 해상 컨 운송 시스템을 갖춘 정기선사의 존재가 크게 부각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불행히도 유일한 원양 국적 정기선사인 대한해운공사는 북미호와 동남아항로에 여전히 재래선을 운항하고 있었다. 결국 모든 정기항로의 컨테이너운송은 속속 한국 취항을 개시한 세계 굴지의 외국 정기선사들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국내 외항 해운계는 이들 외국 정기선사의 한국GSA를 담당하고 있는 대리점선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이러다보니 한국에서 컨테이너 해상 운송은 시작되었으나 이에 대한 뚜렷한 지침서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해운 기사는 정기선사의 일반적 패턴인 컨테이너 운송에 따른 각종 용어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예를 들면 TEU, FEU, Freight Conference, off-dock CY, Container Terminal, chatering 등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들 해운 용어를 설명해 주는 자료나 서적이 전무했다. 필자는 그 때 그 때 기사에 쓰일 해운 용어를 업계 관계자들에게 물어 해운 용어 내용을 파악한 뒤 기사를 작성해야 했다. 그러자 편집국 곽효석 국장이 그렇게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아예 해운용어 시리즈를 연재하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시작한 해운용어 해설 시리즈는 그 후 상당 기간 계속되었다. 특히 새로이 등장하는 해운용어에 대해서는 보다 면밀하고 상세한 해설 기사로 실었다. 이렇게 10여 년 동안 축적한 자료를 알파벳순으로 재배치 한 뒤 원고는 쉽게 완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행본으로 발간하기 위해서는 보다 정확한 기술이 요구되어 해운계 권위자들에게 원고 감수를 요청하게 되었다. 해운 전체 용어 중 대부분은 당시 한국해기사협회 회장이던 이준수 회장에게 부탁했다. 이 회장은 해양대 학장을 마치고 해기사협회를 관장하고 있어 협회가 있는 부산에 수시로 내려갔다.

다행스럽게도 이 회장은 필자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또 운임 동맹 및 컨테이너 운송 분야는 FEFC 김성응 대표에게, 그리고 용선 분야는 뉴코리아해운 박광택 차장에게 감수를 요청, 모두 승낙을 받았다.

감수의 시간이 소요되어 결국 해운용어 해설집은 1980년 10월 말 경에 발간을 완료했다. 공교롭게도 10.26 사건으로 계엄령이 선포되어 모든 서적은 계엄사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이 같은 우여곡절 끝에 발간된 용어해설집은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주로 하주들이 많이 구입, 발간 보름 만에 제작비는 물론이고 기타 부대비용까지 모두 커버하고도 상당액의 수익을 실현, 발행인의 대만족을 이끌어냈다.

그런데 발간 한 달여 만에 크나큰 변수가 발생했다. 대한해운공사 조사부에서 일본의 해운용어사전을 그대로 번역, 해운용어사전이라는 단행본을 발간, 무료로 선하주들에게 나눠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움직임을 필자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어를 그대로 번역, 한국 해운계 실정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상당수의 용어까지 그대로 활자화할 줄은 몰랐다. 제대로 된 작업을 하고 발간을 하려면 적어도 필자 발생 도서 보다 수 개월 이상은 시일이 소요되리라 판단했기에 빠른 발간은 의외였다.

이 같은 일본 해운 용어 사전을 그대로 번역하다보니 이후 이 책....자로 인한 부작용이 빈번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일부 한국 정기선 해운계 실상을 모르는 교수들에 의해 인용되고 활용된 부정확한 해운 관련 논문이나 기고문이 심심찮게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현상은 20세기 내내 지속적으로 야기되었다.


- 이종옥 발행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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