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38주년 특집 / 해운기자 50년의 뒷이야기(1)

취재부
2022-10-25

"해운기자 가능케 한두 가지 요인"

 

- 연재를 시작하면서 -


지난 1973년 ROTC 육군 중위로 전역한 뒤 곧바로 해운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올해로 50년의 해운 기자 경력을 갖게 되었다. 또 만으로는 내년인 2023년이면 정확히 50년, 즉 반세기의 해운기자 삶을 살아온 것이다.

역사에서도 정사가 있고 또 야사가 있듯이 해운기자로서의 취재 일화를 그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칼럼을 통해 기술해 왔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식 해운 기사로 다루지 못한 취재 뒤안길의 여러 사안들을 어떤 체계적이고 정돈된 순서가 아닌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작성해 보고자 한다. 여기에는 남모르는 필자만의 고충이 있다.

바로 오랜 기간 만성질환(혈액투석 33년)으로 망막에 손상이 오고 노안까지 겹쳐 아주 큰 글씨 외에는 읽을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지난 세월 필자가 작성한 취재일지나 관련 자료들을 읽을 수가 없다. 따라서 그저 기억 속에서 아직도 잊히지 않고 남아 있는 생각들을 기술하고자 한다.

50년 세월의 경력을 내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좀 더 명확하게 살아있는 기억들을 활자화함으로써 필자가 그동안 줄기차게 주장해 왔던 한국 해운계의 기록 문화 개선에 일조를 감당하기 위해서이다. 이 점을 감안,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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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했다. 필자가 학창시절을 보냈던 50-60년대만 해도 지금과 같은 첨단 IT기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외지에 나가 있는 친지나 친구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길은 편지가 유일했다. 이는 연인과의 연락도 마찬가지였다. 필자는 8남매의 막내아들로 1899년생이신 부친과 1900년생이신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일찍 타계했으나 모친은 91세까지 장수하시면서 일생 필자와 함께 생활했다. 모친은 한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드문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구어체여서 필자의 손위 누님들에게 모친이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는 필자로 하여금 그 내용을 편지로 대신 쓰게 했다. 국민학교(오늘의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작, 대학 때까지 계속하여 글 쓰는 일이 하나의 생활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도 글 쓰는 일을 좋아하고 잘하는 편이어서 특별한 부담은 없었다. 책 읽기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삼국지를 다섯 번이나 읽었고 중학교 때 부터 한국문학전집과 세계문학전집에 수록된 소설들을 읽어나갔다. 특히 역사소설을 좋아해서 중1때 읽은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이나 이광수의 ‘이차돈의 사’ 등이 기억난다. 특별히 박화성의 ‘고개를 넘으면’이나 김소월의 시 등은 아주 인상이 깊어 김소월의 ‘가는 길’이나 ‘먼 후일’ 같은 시는 지금도 전문을 외우고 있을 정도이다.

대학도 인문학(독어독문학)을 전공해서 괴테의 ‘파우스트’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원어로 공부한 기억이 있다. 또 문학 외에도 철학, 교육 등 타 인문학 분야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런 글쓰기와 독서에의 몰두는 다른 부작용을 낳았다. 바로 대인 관계가 원활하지 못했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이 거북했다. 그리고 우리 시대 젊은이들이 흔히 그러하듯 부정적인 시각과 사회에 대한 염세주의적 사고가 항상 뒤따라 다녔다.

이런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성향은 대학 3학년 ROTC 후보생이 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3학년 여름방학 기간 한 달 동안 군 부대에 입소, 병영생활을 경험하면서 성격이 활발한 쪽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소위 임관 후 육군 전방 보병사단의 연대 직할대 전투지원중대 소대장으로 근무하면서 그야말로 성향이 180도 변해버렸다.

훈련 연대에서 소대원 또는 중대원들을 상대로 정훈교육 강의를 자주 하게 되었다. 또 직속 부하 30명 소대원을 관리하고 운용하는 과정을 통해 리더십은 물론이고 사람을 다루는 능력도 키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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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기자 첫 출발은 캐리어들이 광고주인 상황에서 캐리어들이 가장 큰 관심을 보이는 쉬퍼들에 대한 연재였다. 그야말로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연재를 가능케 할 취재 기자가 없었다. 그래서 필기시험(영어 번역)에 합격한 뒤 사장(발행인)과의 면접에서 그야말로 패기가 넘쳐 자칫 오만불손하게 보일 수 있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합격할 수 있었다.

필자로서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미 대기업에 합격, 신체검사만 남겨놓고 있는 상태여서 해운 주간지 외에도 갈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운기자 생활이 시작되고 곧바로 ‘선적책임자 순방’ 코너 취재에 나섰다. 처음 만난 하주가 삼기물산의 김문수 과장이다. 김 과장과는 그 후 절친 사이가 되어 필자 결혼식의 사회를 맡아준 바 있다.

그 때만 해도 인맥이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취재 과정에서도 아주 중요한 성공 요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삼성물산, 금성사 등 주요 대기업의 선적담당자들은 대부분 ROTC 동기들이었다. 관행상 대기업형 무역회사의 선박담당자는 신입사원 몫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중견 무역업체들은 선적 실무 경력자들이 담당하는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실제 금성사의 경우 선적담당자는 이학수로 고교 동기동창과 ROTC 동기였다. 그래서 선적책임자 노용악 과장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하주업체 뿐 아니라 해운회사 취재에서도 ROTC 동문들과의 만남이 취재에 아주 긍정적인 작용을 했다. 예를 들어 뉴코리아해운 김기훈 사원은 ROTC 2년 선배였고 에버렛기선 EOL담당 최기석 대리는 대학 및 ROTC 3년 선배였다. 이들로 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이 밖에도 협성쉬핑의 김도희 사원이나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ROTC 선배들이 해운계에 적지 않게 포진해 있었다. ROTC 동문이 중요한 것은 대구 출신인 필자에게 동향 선배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운계 대구 출신은 뉴코리아해운 김윤회 회장, 협성선박 마상곤 부장, 그리고 고려해운 박장균 과장 등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래서 ROTC 동문들과의 교분이 해운 기자 생활을 원활하게 수행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 이종옥 발행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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