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어린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긍정적이고 진취적 기상을 지니게 됨이 교육계의 일반적 상식이다. 반면 부모로 부터 돌봄을 체험하지 못하고 성장한 어린이는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기질을 지니게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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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지나친 애정이나 관심으로 부담감 속에 성장한 어린이도 성인이 되면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외항해운계에 한 때 업계를 리드하던 굴지의 해운회사들이 해운합리화와 IMF 파고를 넘지 못하고 좌초하는 케이스도 많았다. 또 지나친 당국의 관심과 보호로 인해 대외 경쟁력을 상실하고 끝내 간판을 내린 대형 해운기업도 한 둘이 아니다.
우리 외항해운계를 인체에 비유해보면 50년대는 유아기, 60년대는 청소년기에 해당된다. 그런 의미에서 50-60년대 한국 해운계를 이끌었던 해운회사들의 발전 상황을 되돌아봄은 지극히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45년 광복 후 1948년 정부 수립까지 미군정 치하의 한국 해운계는 한국해양대학 설립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해운사적 사연이 없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우선이라는 총독부 관할 외항해운사가 있었으나 한일항로나 연근해 항로 취항에 그쳤다. 그래서 한국 외항해운의 역사는 1950년 1월 1일부 정부조직법에 의거 설립된 국영선사 대한해운공사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런데 대한해운공사는 국영선사였으되 그 구성이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했다. 과거 조선우선 소속의 남은 선박들과 이 당시 민간 해운업자에 의해 운영되던 선박들이 다수 모아 출범했기 때문이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해공은 국내 연안항로 전쟁물자수송이나 국내 생필품 운송에 치중했다. 미군 측에서 일본 선사들로 하여금 한일간 물자수송을 담당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일본 해운계는 급속한 성장세를 구가했고 그다지 멀지 않은 시기에 세계 외항해운계 중심축의 하나가 되었다.
6.25 전쟁이 휴전으로 막을 내리자 미군, 특히 미 해군이 철수하면서 상륙정이나 예인선 등 일부 화물선으로 전환이 가능한 선박들이 저렴한 가격에 한국 선주들에게 남겨졌다. 이들 미군이 남기고 간 선박들을 개조해서 화물선으로 변신한 국적선들이 그나마 대형선에 속할 정도였다.
50년대 한국 외항해운은 전쟁으로 성장가도를 달리지 못하고 60년대를 맞았다. 60년대 초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성공을 거두자 비로소 한국의 외항해운계는 미흡하게나마 골격을 갖추기 시작했다. 60년대 중후반 수출품이 대량으로 세계 각지로 수송되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외국 굴지의 외항해운사들이 한국에 진출, 한국 외항해운계는 국제해운대리점선사들에 의해 주도되기 시작했다.
50-60년대 한국 외항해운계가 얼마나 미약했는지 60년대 말 당시 해운행정을 감당했던 교통부와 선주협회 및 해운조합이 공동으로 발간한 ‘한국의 해운’이라는 국영문 혼용책자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자에 의하면 50-60년대 한국 해운계는 연안선 단체인 해운조합이 앞서 나갔고, 그 뒤를 선주협회가 따라가는 형국이었다.
이에 대한 단적인 증거로 그 당시 한국 외항해운선사를 대표했던 대한해운공사가 선주협회와 해운조합에 동시에 회원사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해공 뿐 아니라 당시 국적선사 대부분이 마찬가지였다. 국적 외항선사들이 연안운송에 크게 의존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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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한국 외항해운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계기가 하나 시작되는데 바로 현 KCTC 신태범 회장에 의해 성공한 제1차 계획조선사업이다. 그 때 한국의 조선은 규모가 가장 큰 국영 대한조선공사의 신조선 중 가장 대형선이 500gt급이었다. 그나마 신조선 수주는 거의 없어서 수리업무로 명맥을 유지하던 상황이었다.
1962년 신태범 당시 해운공사 군산호 선장 겸 수리 감독이 파손된 군산호를 조선공사에 수리 의뢰를 하면서 사연은 시작되었다. 조선공사로서는 최대 고객이 해공이었고 신태범 선장이 실무책임자였다. 이에 신태범 선장은 업무를 위해 수시로 조선공사에 출입하고 당시 육군대령으로 조선공사를 이끌던 이영진 사장을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이영진 사장은 신 선장을 크게 신뢰, 조선공사 경영의 전반적인 자문을 구할 정도였다.
어느 날 이영진 사장이 조선공사 신조선 수주 문제로 신 선장에게 상의를 하던 과정에서 신 선장은 평소 지니고 있던 계획조선 사업을 소개했다. 일본도 계획조선으로 해운과 조선이 동시에 크게 성장했듯이 우리도 계획조선으로 해운·조선업이 다 같이 발전하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신 선장은 당시 국내에서 구할 수 없는 대형 신조선 설계도를 일본 해운잡지에 게재된 6,200톤급 도면을 구해 사업을 구체화 시켰다. 그 때만 해도 500톤 이상의 신조선을 건조해 본 적이 없었기에 조선공사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특히 한국 외항해운계는 불가능하다고 간주했으나 신 선장은 과감하게 6,200톤급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영진 사장과 상공부 조선과장의 협조를 얻어 어렵게 결실을 보였다. 그런데 이러한 해운조선 육성 방안의 참여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선가의 10%만 선주가 부담하고 나머지는 정부에서 모두 감당하는 파격적인 조치였지만 건조하겠다고 나서는 해운 회사, 해운인이 없었다.
이에 “그러면 내가 해보겠다.”는 의사 표명과 동시에 해공을 사직한 신태범 선장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험한 길을 온갖 난관과 장애를 극복하고 6,200dwt급 신양호와 동양호 건조에 성공했다. 이것이 오늘날 고려해운이 한국 외항해운업을 선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신태범 회장의 성공을 본 해운인들이 그제야 너도나도 신조선 의뢰를 시작, 얼마 지나지 않아 경쟁이 치열해지는 또 다른 현상이 도래할 정도였다.
결국 50-60년대 한국 외항해운의 최대 성과는 신태범 회장에 의해 입안되고 추진되어 성공을 거둔 제1차 계획조선사업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신 회장의 결실은 그 이후 한국 외항해운업이 성장·발전하는 촉매제가 되었음은 누구도 부인 못할 사실이다.
- 이종옥 발행인 -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어린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긍정적이고 진취적 기상을 지니게 됨이 교육계의 일반적 상식이다. 반면 부모로 부터 돌봄을 체험하지 못하고 성장한 어린이는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기질을 지니게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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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지나친 애정이나 관심으로 부담감 속에 성장한 어린이도 성인이 되면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외항해운계에 한 때 업계를 리드하던 굴지의 해운회사들이 해운합리화와 IMF 파고를 넘지 못하고 좌초하는 케이스도 많았다. 또 지나친 당국의 관심과 보호로 인해 대외 경쟁력을 상실하고 끝내 간판을 내린 대형 해운기업도 한 둘이 아니다.
우리 외항해운계를 인체에 비유해보면 50년대는 유아기, 60년대는 청소년기에 해당된다. 그런 의미에서 50-60년대 한국 해운계를 이끌었던 해운회사들의 발전 상황을 되돌아봄은 지극히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45년 광복 후 1948년 정부 수립까지 미군정 치하의 한국 해운계는 한국해양대학 설립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해운사적 사연이 없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우선이라는 총독부 관할 외항해운사가 있었으나 한일항로나 연근해 항로 취항에 그쳤다. 그래서 한국 외항해운의 역사는 1950년 1월 1일부 정부조직법에 의거 설립된 국영선사 대한해운공사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런데 대한해운공사는 국영선사였으되 그 구성이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했다. 과거 조선우선 소속의 남은 선박들과 이 당시 민간 해운업자에 의해 운영되던 선박들이 다수 모아 출범했기 때문이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해공은 국내 연안항로 전쟁물자수송이나 국내 생필품 운송에 치중했다. 미군 측에서 일본 선사들로 하여금 한일간 물자수송을 담당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일본 해운계는 급속한 성장세를 구가했고 그다지 멀지 않은 시기에 세계 외항해운계 중심축의 하나가 되었다.
6.25 전쟁이 휴전으로 막을 내리자 미군, 특히 미 해군이 철수하면서 상륙정이나 예인선 등 일부 화물선으로 전환이 가능한 선박들이 저렴한 가격에 한국 선주들에게 남겨졌다. 이들 미군이 남기고 간 선박들을 개조해서 화물선으로 변신한 국적선들이 그나마 대형선에 속할 정도였다.
50년대 한국 외항해운은 전쟁으로 성장가도를 달리지 못하고 60년대를 맞았다. 60년대 초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성공을 거두자 비로소 한국의 외항해운계는 미흡하게나마 골격을 갖추기 시작했다. 60년대 중후반 수출품이 대량으로 세계 각지로 수송되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외국 굴지의 외항해운사들이 한국에 진출, 한국 외항해운계는 국제해운대리점선사들에 의해 주도되기 시작했다.
50-60년대 한국 외항해운계가 얼마나 미약했는지 60년대 말 당시 해운행정을 감당했던 교통부와 선주협회 및 해운조합이 공동으로 발간한 ‘한국의 해운’이라는 국영문 혼용책자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자에 의하면 50-60년대 한국 해운계는 연안선 단체인 해운조합이 앞서 나갔고, 그 뒤를 선주협회가 따라가는 형국이었다.
이에 대한 단적인 증거로 그 당시 한국 외항해운선사를 대표했던 대한해운공사가 선주협회와 해운조합에 동시에 회원사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해공 뿐 아니라 당시 국적선사 대부분이 마찬가지였다. 국적 외항선사들이 연안운송에 크게 의존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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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한국 외항해운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계기가 하나 시작되는데 바로 현 KCTC 신태범 회장에 의해 성공한 제1차 계획조선사업이다. 그 때 한국의 조선은 규모가 가장 큰 국영 대한조선공사의 신조선 중 가장 대형선이 500gt급이었다. 그나마 신조선 수주는 거의 없어서 수리업무로 명맥을 유지하던 상황이었다.
1962년 신태범 당시 해운공사 군산호 선장 겸 수리 감독이 파손된 군산호를 조선공사에 수리 의뢰를 하면서 사연은 시작되었다. 조선공사로서는 최대 고객이 해공이었고 신태범 선장이 실무책임자였다. 이에 신태범 선장은 업무를 위해 수시로 조선공사에 출입하고 당시 육군대령으로 조선공사를 이끌던 이영진 사장을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이영진 사장은 신 선장을 크게 신뢰, 조선공사 경영의 전반적인 자문을 구할 정도였다.
어느 날 이영진 사장이 조선공사 신조선 수주 문제로 신 선장에게 상의를 하던 과정에서 신 선장은 평소 지니고 있던 계획조선 사업을 소개했다. 일본도 계획조선으로 해운과 조선이 동시에 크게 성장했듯이 우리도 계획조선으로 해운·조선업이 다 같이 발전하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신 선장은 당시 국내에서 구할 수 없는 대형 신조선 설계도를 일본 해운잡지에 게재된 6,200톤급 도면을 구해 사업을 구체화 시켰다. 그 때만 해도 500톤 이상의 신조선을 건조해 본 적이 없었기에 조선공사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특히 한국 외항해운계는 불가능하다고 간주했으나 신 선장은 과감하게 6,200톤급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영진 사장과 상공부 조선과장의 협조를 얻어 어렵게 결실을 보였다. 그런데 이러한 해운조선 육성 방안의 참여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선가의 10%만 선주가 부담하고 나머지는 정부에서 모두 감당하는 파격적인 조치였지만 건조하겠다고 나서는 해운 회사, 해운인이 없었다.
이에 “그러면 내가 해보겠다.”는 의사 표명과 동시에 해공을 사직한 신태범 선장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험한 길을 온갖 난관과 장애를 극복하고 6,200dwt급 신양호와 동양호 건조에 성공했다. 이것이 오늘날 고려해운이 한국 외항해운업을 선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신태범 회장의 성공을 본 해운인들이 그제야 너도나도 신조선 의뢰를 시작, 얼마 지나지 않아 경쟁이 치열해지는 또 다른 현상이 도래할 정도였다.
결국 50-60년대 한국 외항해운의 최대 성과는 신태범 회장에 의해 입안되고 추진되어 성공을 거둔 제1차 계획조선사업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신 회장의 결실은 그 이후 한국 외항해운업이 성장·발전하는 촉매제가 되었음은 누구도 부인 못할 사실이다.
- 이종옥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