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 6월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한국선주협회의 사장단연찬회에서 김영무 상근부회장이 참석한 선사 관계자 여러 명과 환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당시 취재차 연찬회장을 방문하여 로비를 돌아다니던 기자를 김 부회장이 불렀다. 그리고는 관계자들에게 기자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일우 기자 살 빠진 거 봐봐. 보기 좋지 않아? 몸이 엄청 좋아졌어.” 당시 기자는 과체중으로 인해 발생한 고혈당을 다시 내리고자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의 체중 감량을 하고 있었고, 그 결과로 초기에 비해 약 30kg 가량이 빠진 상황이었다. (물론 지금은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살이 오른 상태이다.) 기자의 마른 체형과 얼굴을 보던 사람들은 병색이 느껴진다며 안타까워하고 있었지만, 유독 김 부회장은 기자를 볼 때마다 살 빠진 모습을 흐뭇해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기왕 이렇게 된 거 축구선수 수준의 체지방률에 도전해 보는 건 어떻겠냐는 무서운(?) 제안을 한 적도 있었다. 왜 그렇게 김 부회장이 기자의 살 빠진 모습을 좋게 보았는지는 김 부회장의 평상시 삶의 패턴을 아는 사람이면 지레 짐작할 수 있다. 그동안 김 부회장 자신이 엄청난 노력으로 체중 등을 관리하면서 살아왔고, 지금도 그런 삶의 패턴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영무 부회장이 자타가 공인하는 스포츠매니아인건 그와 잠시라도 교제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 수 있다. 틈만 나면 등산과 사이클 등 체력을 요하는 스포츠에 몰두하고 주말에는 아예 시간을 정해놓고 스포츠를 통해 운동량을 채우고 있다. 그리고 몸 관리를 하는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식사 관리를 몇 십 년 동안 꾸준히 하고 있다. 실제로 기자단과의 오찬 간담회가 있을 때는 하루 식사량을 유지하고자 종일 단식하고 오기도 한다. 그렇게 오랜 기간 자기 절제의 삶을 살다보니, 기자가 단기간에 체중을 대폭 감량하기까지 어떤 노력이 있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랬기에 그 당시 기자를 그렇게도 대견스러운 눈으로 바라본 게 아닌가 싶다. (물론 다시 살이 오른 지금은 볼 때마다 왜이리 살쪘냐고 핀잔을 주시지만.) 이처럼 40년간 지속해 온 김 부회장의 절제된 삶이, 그를 정확하게 40년 동안 해운업계의 중심인 한국해운협회에서 종사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한국해양대 항해과를 졸업하고 대한선주와 조양상선에서 1등 항해사로 승선근무를 한 뒤 지난 1981년 한국선주협회(현 한국해운협회)에 입사한 김영무 부회장은 한국 해운의 수많은 파고들을 경험하며 지난 40년을 해운협회 소속으로 지내왔다. 입사 3년 만에 해운 합리화 조치가 시행되는 등 해운업 혼란의 시기를 몸소 겪었고, 1997년의 IMF와 2009년의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인한 경제 위기를 모두 경험하면서, 당시 선주협회의 실무자로서 해운업계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 힘써왔다. 국제선박등록제와 선박투자회사제도, 톤세제도, 한국선주상호보험 등 우리 해운업을 한 단계 발전시킨 주요 정책들은 모두 그의 주도 하에 국가 정책으로 입안되었다. 특히 김 부회장이 평사원 시절부터 주장해 왔던 해사전문은행 창립은 지난 2018년 한국해양진흥공사의 출범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고, 2008년 해양수산부 폐지와 경제 위기로 해운업계가 위기에 빠져 있을 때 시작한 해양수산부 부활 운동은 전국해양산업총연합회(현 한국해양산업총연합회)의 출범과 5년만의 해양수산부 부활이라는 열매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2000년대 중반 선주협회 소유의 해운빌딩을 마련키로 하고 기금을 모아 여의도 해운빌딩 시대를 연 것은 김영무 부회장의 최대 치적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2000년대 후반 세계 금융위기가 도래하고 시황이 떨어지는 과정을 겪으면서 사옥 매입 추진이 좌초될 위험에도 놓였지만, 김 부회장이 당시 협회 회장단과 함께 밀어붙여 매입한 해운빌딩은 현재 대한민국 해운의 중심으로 굳게 서있다. 한국해운협회를 비롯하여, 한국해양산업총연합회와 대한민국해양연맹, 한국선주상호보험조합(KP&I), 한국해양진흥공사 서울사무소, 한국선급 서울지부, KMI 공동연구협력센터 등이 해운빌딩에 입주해 있으며, 해운빌딩 10층의 대회의실은 국내 해운업계의 세미나·협약식 등 각종 행사 때마다 단골로 쓰이는 장소로서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기자가 소속된 해양수산부 출입 해운전문지기자단의 전용기자실도 해운빌딩 10층 대회의실 옆에 자리 잡고 있다. 한때 대형 선사들 다수가 운영해 왔던 기자실이 코로나 등의 영향으로 대부분 폐지된 상황에서 해운빌딩에 존속되고 있는 해운기자단 기자실은 한국 해운의 역사와 함께해 온 전문지 기자단이 정론집필의 역할을 지속적으로 담당하는 데에 귀하게 쓰이고 있다.
이처럼 김영무 부회장이 지난 40년간 한국 해운의 발자취 한 가운데에서 함께 해 온 만큼, 그를 한국 해운 근대사의 산 증인이라 평해도 결코 과언은 아니리라 생각된다. 이제 내년 1월 해운협회 정기총회를 마지막으로 그의 40년의 해운협회 생활은 마감을 하게 된다. 지난 주 그의 부회장 임기 마지막으로 개최된 해운전문지 간담회에서 김 부회장은 “자신이 물러난 뒤에도 해운 전문지는 정론의 역할을 계속 담당해주길 부탁한다.”고 말한 바 있다. 마지막까지 업계를 생각하고 부탁하는 김 부회장의 모습에서 그가 지난 40년간 오직 해운업계 하나만 바라보고 일해왔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비록 조용히 물러나지만, 그가 지금까지 40년간 우리 해운업계에 뿌려놓은 씨앗들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업계를 존속시키고 발전시키는 데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게 되리라 믿는다. 마지막까지 업계를 위해 고생했던 김영무 부회장에게 40년간 수고 많으셨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아울러, 앞으로도 해운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어떤 영역에서든 우리 업계의 발전을 위한 역할을 담당해 주시기를 기대해 본다. “김영무 부회장님,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 이일우 부장 -
지난 2019년 6월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한국선주협회의 사장단연찬회에서 김영무 상근부회장이 참석한 선사 관계자 여러 명과 환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당시 취재차 연찬회장을 방문하여 로비를 돌아다니던 기자를 김 부회장이 불렀다. 그리고는 관계자들에게 기자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일우 기자 살 빠진 거 봐봐. 보기 좋지 않아? 몸이 엄청 좋아졌어.” 당시 기자는 과체중으로 인해 발생한 고혈당을 다시 내리고자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의 체중 감량을 하고 있었고, 그 결과로 초기에 비해 약 30kg 가량이 빠진 상황이었다. (물론 지금은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살이 오른 상태이다.) 기자의 마른 체형과 얼굴을 보던 사람들은 병색이 느껴진다며 안타까워하고 있었지만, 유독 김 부회장은 기자를 볼 때마다 살 빠진 모습을 흐뭇해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기왕 이렇게 된 거 축구선수 수준의 체지방률에 도전해 보는 건 어떻겠냐는 무서운(?) 제안을 한 적도 있었다. 왜 그렇게 김 부회장이 기자의 살 빠진 모습을 좋게 보았는지는 김 부회장의 평상시 삶의 패턴을 아는 사람이면 지레 짐작할 수 있다. 그동안 김 부회장 자신이 엄청난 노력으로 체중 등을 관리하면서 살아왔고, 지금도 그런 삶의 패턴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영무 부회장이 자타가 공인하는 스포츠매니아인건 그와 잠시라도 교제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 수 있다. 틈만 나면 등산과 사이클 등 체력을 요하는 스포츠에 몰두하고 주말에는 아예 시간을 정해놓고 스포츠를 통해 운동량을 채우고 있다. 그리고 몸 관리를 하는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식사 관리를 몇 십 년 동안 꾸준히 하고 있다. 실제로 기자단과의 오찬 간담회가 있을 때는 하루 식사량을 유지하고자 종일 단식하고 오기도 한다. 그렇게 오랜 기간 자기 절제의 삶을 살다보니, 기자가 단기간에 체중을 대폭 감량하기까지 어떤 노력이 있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랬기에 그 당시 기자를 그렇게도 대견스러운 눈으로 바라본 게 아닌가 싶다. (물론 다시 살이 오른 지금은 볼 때마다 왜이리 살쪘냐고 핀잔을 주시지만.) 이처럼 40년간 지속해 온 김 부회장의 절제된 삶이, 그를 정확하게 40년 동안 해운업계의 중심인 한국해운협회에서 종사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한국해양대 항해과를 졸업하고 대한선주와 조양상선에서 1등 항해사로 승선근무를 한 뒤 지난 1981년 한국선주협회(현 한국해운협회)에 입사한 김영무 부회장은 한국 해운의 수많은 파고들을 경험하며 지난 40년을 해운협회 소속으로 지내왔다. 입사 3년 만에 해운 합리화 조치가 시행되는 등 해운업 혼란의 시기를 몸소 겪었고, 1997년의 IMF와 2009년의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인한 경제 위기를 모두 경험하면서, 당시 선주협회의 실무자로서 해운업계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 힘써왔다. 국제선박등록제와 선박투자회사제도, 톤세제도, 한국선주상호보험 등 우리 해운업을 한 단계 발전시킨 주요 정책들은 모두 그의 주도 하에 국가 정책으로 입안되었다. 특히 김 부회장이 평사원 시절부터 주장해 왔던 해사전문은행 창립은 지난 2018년 한국해양진흥공사의 출범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고, 2008년 해양수산부 폐지와 경제 위기로 해운업계가 위기에 빠져 있을 때 시작한 해양수산부 부활 운동은 전국해양산업총연합회(현 한국해양산업총연합회)의 출범과 5년만의 해양수산부 부활이라는 열매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2000년대 중반 선주협회 소유의 해운빌딩을 마련키로 하고 기금을 모아 여의도 해운빌딩 시대를 연 것은 김영무 부회장의 최대 치적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2000년대 후반 세계 금융위기가 도래하고 시황이 떨어지는 과정을 겪으면서 사옥 매입 추진이 좌초될 위험에도 놓였지만, 김 부회장이 당시 협회 회장단과 함께 밀어붙여 매입한 해운빌딩은 현재 대한민국 해운의 중심으로 굳게 서있다. 한국해운협회를 비롯하여, 한국해양산업총연합회와 대한민국해양연맹, 한국선주상호보험조합(KP&I), 한국해양진흥공사 서울사무소, 한국선급 서울지부, KMI 공동연구협력센터 등이 해운빌딩에 입주해 있으며, 해운빌딩 10층의 대회의실은 국내 해운업계의 세미나·협약식 등 각종 행사 때마다 단골로 쓰이는 장소로서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기자가 소속된 해양수산부 출입 해운전문지기자단의 전용기자실도 해운빌딩 10층 대회의실 옆에 자리 잡고 있다. 한때 대형 선사들 다수가 운영해 왔던 기자실이 코로나 등의 영향으로 대부분 폐지된 상황에서 해운빌딩에 존속되고 있는 해운기자단 기자실은 한국 해운의 역사와 함께해 온 전문지 기자단이 정론집필의 역할을 지속적으로 담당하는 데에 귀하게 쓰이고 있다.
이처럼 김영무 부회장이 지난 40년간 한국 해운의 발자취 한 가운데에서 함께 해 온 만큼, 그를 한국 해운 근대사의 산 증인이라 평해도 결코 과언은 아니리라 생각된다. 이제 내년 1월 해운협회 정기총회를 마지막으로 그의 40년의 해운협회 생활은 마감을 하게 된다. 지난 주 그의 부회장 임기 마지막으로 개최된 해운전문지 간담회에서 김 부회장은 “자신이 물러난 뒤에도 해운 전문지는 정론의 역할을 계속 담당해주길 부탁한다.”고 말한 바 있다. 마지막까지 업계를 생각하고 부탁하는 김 부회장의 모습에서 그가 지난 40년간 오직 해운업계 하나만 바라보고 일해왔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비록 조용히 물러나지만, 그가 지금까지 40년간 우리 해운업계에 뿌려놓은 씨앗들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업계를 존속시키고 발전시키는 데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게 되리라 믿는다. 마지막까지 업계를 위해 고생했던 김영무 부회장에게 40년간 수고 많으셨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아울러, 앞으로도 해운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어떤 영역에서든 우리 업계의 발전을 위한 역할을 담당해 주시기를 기대해 본다. “김영무 부회장님,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 이일우 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