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38주년 특집 / 해운기자 50년의 뒷이야기(3)

취재부
2022-12-14

특별히 기억하는 해운 기자들(1)

 

70년대 초 ROTC 육군 중위로 전역한 뒤 곧바로 입사한 한국 최초의 해운 주간지 편집국에는 편집국장 외 2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한 명은 J대 영문과 출신의 K모 기자였다. 외신 번역과 스케줄 분야를 담당했다. 몸이 워낙 약해 취재는 당초부터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리고 자칭 Y대 출신이라는 L여기자가 근무 중이었다. 필자는 취재담당으로 그동안 쌓여있는 취재 기자 노하우가 전무해서 필자는 오로지 혼자서 새 길을 개척하려고 했다.

Y대 법학과 출신의 발행인은 어느 날 Y대 동문회가 그동안 거쳐 간 모든 동문들을 가나다순으로 이름을 정리한 아주 두꺼운 동문록을 보내와 발행은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고 L기자의 이름을 찾았으나 없었다. 동문회 사무실에 전화, 발행인은 최종적으로 L기자가 Y대 출신이 아님을 확인했다.

이 일로 L여기자는 곧바로 퇴직 당했다. 그리고 필자와 K기자는 졸업증명서를 제출하라는 회사의 지시에 순응, 제출했다. 그동안은 이력서 내용을 믿고 서류 확인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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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여기자를 대신해 필자의 후배 기자로 입사한 인물이 김 모 여기자였다. 필자보다 서너 살 위였고 S대를 나온 재원이었다. 영어번역도 곧잘 하여 번역과 취재를 겸하라는 편집국장의 지시가 있었다.

70년대 초 해운 주간지는 광고는 옵셋트 인쇄를, 그리고 기사 면은 활판 인쇄를 택해 간행되고 있었다. 서대문에 위치한 인쇄소에서 금요일 하루 종일 매달려 교정을 보아야만 했다. 금요일 아침 일찍 인쇄소에 가면 그 전날 송부한 기사와 스케줄 지면이 활판으로 짜져서 교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내내 1차 교정을 완료, 활자를 제작하고 수정하는 조판실로 내려 보낸 뒤 3명의 기자들은 점심식사를 하러 나갔다.

통상 오후 3시가 넘어야 1차 수정한 교정지를 볼 수 있어서 그동안은 주로 다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전화한 결과 교정지가 나와 있다면 곧바로 인쇄소로 향했다.

이렇게 긴 점심시간을 보내 지루하던 어느날 김 여기자가 당시 서울에 처음 건축된 마포의 아파트 내 자신의 집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커피도 끓여주고 아주 드물게 식사도 같이 했다.

인쇄소에 밤늦게까지 지내야 하기에 회사에서는 중식과 석식 식대를 가져가게 했다. 이 돈으로 재료를 사가지고 가면 김 여기자가 정갈하고 맛깔 나는 음식을 만들어 주어 3명의 기자들은 맛있는 식사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워낙 박봉의 급여를 견디다 못한 김 여기자는 입사 2년 좀 남은 시점에서 퇴직했다. 그리고 입사한 후배 기자가 K 남기자였다. S대 중문과 출신으로 경향신문 교열팀(교정 업무)에 근무하다 사직하고 해운 주간지에 들어왔는데 발행인의 낙하산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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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대 출신임을 워낙 내세우다보니 편집국 소속 기자들은 물론이고 회사의 모든 직원들로부터 질시와 경멸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경향신문에서도 그런 성향으로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인간관계로 사직한 것 같았다. 취재기자로 활동했는데 이는 발행인이 필자의 비중이 너무 크다보니 이를 보완하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었다. 하지만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보니 취재원과도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결국 편집국장은 영어번역 외신기자로 활용하고 말았다.

이 외신기자는 필자보다 2살 위였는데 유난히 필자에게 강한 질투심을 보였다. 학벌은 자신이 우월하다고 자부했으나 업무 능력은 떨어지고 그렇다고 필자를 선배 기자로 깍듯하게 모실 마음도 없었다. 당연히 필자의 도움을 거절했다. 비록 외신을 번역하는 기자였으나 외신 역시 해운 용어로 가득차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난감한 편집국장은 필자로 하여금 1차 데스크를 보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잘못 번역한 해운 용어가 무더기로 발견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몇 년이 흘러 필자가 5년차 해운 기자 경력을 지니게 된 시점에서 회사는 어쩔 수 없이 필자를 취재팀장으로 발령했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K 외신기자는 사표를 내고 떠났다. 그러나 필자가 편집과장 재직 시 다시 평기자로 입사한 K기자는 그동안 고생을 엄청나게 했기 때문인지 예전과 달리 필자를 상사로 깍듯하게 대접, 편집국의 분위기는 한층 밝아졌다. 발행인으로 부터 주의를 단단히 받고 다시 들어온 모양으로 짐작되었다. 그리고 K기자의 친형이 한국에서 드문 자신의 이름을 딴 제과점을 개설하여 엄청난 수익을 올리게 되자, 분점을 하나 맡아 운영하고자 해운 주간지를 떠났다.

그리고 입사한 인물이 후일 필자가 해운 주간지를 떠나고 난 뒤 임원급으로 유일하게 남아 발행인이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있던 K기자이다. K기자는 발행인의 부인 주선으로 편집국 소속 기자로 입사했다. 그런데 기사 작성이 그야말로 황당무계하고 무지한 난맥상으로 점철되어 있는 문장이었다.

여러 번 편집국장이 발행인의 체면을 보아 직접 가르치기도 했으나 나아질 기미가 전혀 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기사로 간주할 수 없는 저급한 문장뿐이었다. 민망했던지 스스로 영업직 직원으로 자원하여 부서를 옮겨갔다. 그리고 필자가 부장일 때 과장직에 올랐고 필자가 대표이사 사장일 때 발행인 부인의 입김으로 평이사로 간신히 승진했다. 이 승진에는 K기자 부인의 공로가 절대적이었다. K기자 부인은 해운 전문지에서 급사 겸 사장비서로 일하던 J여직원이었다. 그리고 J여직원은 결혼 후 남편을 위해 김장철 때마다 발행인의 집으로 찾아가 헌신적인 노력 봉사를 함으로써 발행인 부인으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리고 이것이 K기자가 영업이사로 승진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 이종옥 발행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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