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외항해운사에서 50-60년대를 대표하는 국적선사는 단연코 대한해운공사이다. 해공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호에서 언급한 바 있어 이번에는 해공을 제외한 50-60년대 한국 외항해운 기업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다만 70년대 한국 최초의 해운 기자 생활을 한 필자가 직접 취재한 내용을 중심으로 해운 기자의 시각 하에 기술할 생각이다. 또 60년대 끝자락인 1969년에 설립된 국적 외항 해운사는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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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1954년 4월에 설립되어 오늘날 한국 해운계를 대표하는 국적선사로 성장한 고려해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해운은 창업 당시는 이학철 사장이 단독 대주주로서 주로 연안항로에 취항한 소규모 해운사였다. 그러다 1963년 현 KCTC 신태범 회장에 의해 입안되고 추진되어 성공한 제1차 계획조선으로 2,600DWT급 신양호와 동양호의 취항을 계기로 일약 중견 해운사로 도약했다.
특히 이들 당시 초대 국적선의 신조 건조를 계기로 고려해운은 이학철, 양재원, 신중달 3인 대주주와 신태범(공모주)의 다인 공동 경영 체제로 전환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성공적인 경영 기조를 유지한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무엇보다 한국 최고의 인재영입을 지속적으로 시도, 해상·육상 최우수 인력이 유입되어 고려해운으로 지속성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박장균 상무나 이윤수 부회장, 전문준 사장 등이 그 좋은 예이다.
그리고 해운합리화 등으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오늘날 박현규, 신태범, 이동혁 3인 대주주 체제로 60년대 다인 경영체제를 이어옴으로써 50-60년대 창업한 국적 외항해운회사로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고려해운 외에 50년대에 창업, 지금까지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는 선사로는 1953년 8월에 설립된 남성해운이 있다. 이 회사 역시 내항해운 업체로 시작한 뒤 1963년 제1차 계획조선에 의해 건조된 500톤급 외항선 건조를 계기로 한일항로 중심의 국적선사로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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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50-60년대에 설립되었으되 출렁이는 해운 시황과 급변하는 세계 원양해운 항로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도산,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국적선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빠뜨려 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 국적 선사들 역시 50-60년대 한국 외항해운을 상징하는 국적선사들이기 때문이다.
먼저 업계 랭킹 3위의 대형 외항해운사였던 조양상선이다. 1961년 3월에 박남규 회장에 의해 창업된 이 회사는 보험회사등 다수의 방제회사를 거느린 탁월한 해운 기업이었다. 특히 70년대 한국 외항해운을 주도한 대리점선사 조양에이젠시라는 계열회사도 거느렸다.
그러나 70년대 창업공신들을 한직으로 내몰고 박남규 회장의 다섯 아들들이 사장, 부사장, 전무, 상무 등을 독식, 가족 중심의 국적선사가 됨으로써 경영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해운 전문성도 부족한 이들 창업주의 아들들은 세계적 정기선 변화, 특히 대형 풀 컨테이너선 운항의 기조를 따라가지 못하고 중고선 위주의 풀 컨선을 운영하다 결국 도산하고 말았다. 해공과 마찬가지로 상당한 우수 인재를 배출했으나 허사가 된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대형 국적선사이기도 하다.
특히 박 회장의 맏아들의 급작스러운 타계로 상속에 따른 경영 분쟁까지 야기되어 조양상선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도 참으로 우리 해운사에 기록될 만한 일이기도 하다.
여기에 1969년 12월 이맹기 회장에 의해 창업된 코리아라인도 한국 외항해운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선사였다. 국영해운회사였던 해공의 마지막 CEO였던 이맹기 회장은 1967년 해공의 민영화를 제지하기 위해 당시 박정희 의장까지 찾아가서 존속을 언질받았으나 무산되어 해공은 퇴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이맹기 회장은 몇 사람과 뜻을 모아 코리아라인을 창업한 뒤 Japan Line으로부터 중고 대형 벌크선을 도입하는데 성공했으나 초기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다 포항제철 창업자 박태준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성장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자체 빌딩을 신축하는 등 탁월한 경영을 이어갔고 상호도 대한해운으로 변경했다.
하지만 이맹기 회장의 급작스러운 타계로 2세 이진방 사장이 사주가 된 대한해운은 엄청난 규모의 용선과 대선으로 국내 해운계 랭킹 5위의 대형국적선사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진방 회장은 해운 단체장을 맡는 등 외부 활동에 전념하면서 대학 후배인 전문 경영인 사장에게 경영을 일임하다 결국 시황 하락의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도산하고 말았다. 창업자 이맹기 회장이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성장시킨 대형 국적선사가 2세 경영인의 미숙함으로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같은 2세 경영인들의 미숙한 경영으로 도산한 국적선사들이 대한해운 외에도 동남아해운(동서해운) 등이 존재했었다. 또 경영 분쟁으로 도산한 업계 랭킹 2위 범양전용선도 해운사적 가치가 있는 국적 대형 해운사였다.
이 밖에도 1967년 2월에 설립된 바 있던 국제해운도 한 때 한일 및 동남아항로 강자였다. 또 50년대에 창업되어 국적선사로 해운합리화에 의해 사라진 신한해운도 의미있는 족적을 남긴 해운사였다. 1955년 6월에 현영원 회장에 의해 설립된 이 회사는 현 회장의 사위였던 정몽헌 회장의 현대상선으로 합병되었다.
현 회장은 이 회사의 회장직을 맡기로 했다. 그러다 정 사장이 타계한 후 부인인 현정은 회장이 경영을 맡아 해운계는 물론이고 재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범양전용선의 ‘SILVER PARK’호
한국 외항해운사에서 50-60년대를 대표하는 국적선사는 단연코 대한해운공사이다. 해공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호에서 언급한 바 있어 이번에는 해공을 제외한 50-60년대 한국 외항해운 기업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다만 70년대 한국 최초의 해운 기자 생활을 한 필자가 직접 취재한 내용을 중심으로 해운 기자의 시각 하에 기술할 생각이다. 또 60년대 끝자락인 1969년에 설립된 국적 외항 해운사는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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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1954년 4월에 설립되어 오늘날 한국 해운계를 대표하는 국적선사로 성장한 고려해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해운은 창업 당시는 이학철 사장이 단독 대주주로서 주로 연안항로에 취항한 소규모 해운사였다. 그러다 1963년 현 KCTC 신태범 회장에 의해 입안되고 추진되어 성공한 제1차 계획조선으로 2,600DWT급 신양호와 동양호의 취항을 계기로 일약 중견 해운사로 도약했다.
특히 이들 당시 초대 국적선의 신조 건조를 계기로 고려해운은 이학철, 양재원, 신중달 3인 대주주와 신태범(공모주)의 다인 공동 경영 체제로 전환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성공적인 경영 기조를 유지한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무엇보다 한국 최고의 인재영입을 지속적으로 시도, 해상·육상 최우수 인력이 유입되어 고려해운으로 지속성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박장균 상무나 이윤수 부회장, 전문준 사장 등이 그 좋은 예이다.
그리고 해운합리화 등으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오늘날 박현규, 신태범, 이동혁 3인 대주주 체제로 60년대 다인 경영체제를 이어옴으로써 50-60년대 창업한 국적 외항해운회사로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고려해운 외에 50년대에 창업, 지금까지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는 선사로는 1953년 8월에 설립된 남성해운이 있다. 이 회사 역시 내항해운 업체로 시작한 뒤 1963년 제1차 계획조선에 의해 건조된 500톤급 외항선 건조를 계기로 한일항로 중심의 국적선사로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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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50-60년대에 설립되었으되 출렁이는 해운 시황과 급변하는 세계 원양해운 항로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도산,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국적선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빠뜨려 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 국적 선사들 역시 50-60년대 한국 외항해운을 상징하는 국적선사들이기 때문이다.
먼저 업계 랭킹 3위의 대형 외항해운사였던 조양상선이다. 1961년 3월에 박남규 회장에 의해 창업된 이 회사는 보험회사등 다수의 방제회사를 거느린 탁월한 해운 기업이었다. 특히 70년대 한국 외항해운을 주도한 대리점선사 조양에이젠시라는 계열회사도 거느렸다.
그러나 70년대 창업공신들을 한직으로 내몰고 박남규 회장의 다섯 아들들이 사장, 부사장, 전무, 상무 등을 독식, 가족 중심의 국적선사가 됨으로써 경영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해운 전문성도 부족한 이들 창업주의 아들들은 세계적 정기선 변화, 특히 대형 풀 컨테이너선 운항의 기조를 따라가지 못하고 중고선 위주의 풀 컨선을 운영하다 결국 도산하고 말았다. 해공과 마찬가지로 상당한 우수 인재를 배출했으나 허사가 된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대형 국적선사이기도 하다.
특히 박 회장의 맏아들의 급작스러운 타계로 상속에 따른 경영 분쟁까지 야기되어 조양상선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도 참으로 우리 해운사에 기록될 만한 일이기도 하다.
여기에 1969년 12월 이맹기 회장에 의해 창업된 코리아라인도 한국 외항해운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선사였다. 국영해운회사였던 해공의 마지막 CEO였던 이맹기 회장은 1967년 해공의 민영화를 제지하기 위해 당시 박정희 의장까지 찾아가서 존속을 언질받았으나 무산되어 해공은 퇴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이맹기 회장은 몇 사람과 뜻을 모아 코리아라인을 창업한 뒤 Japan Line으로부터 중고 대형 벌크선을 도입하는데 성공했으나 초기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다 포항제철 창업자 박태준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성장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자체 빌딩을 신축하는 등 탁월한 경영을 이어갔고 상호도 대한해운으로 변경했다.
하지만 이맹기 회장의 급작스러운 타계로 2세 이진방 사장이 사주가 된 대한해운은 엄청난 규모의 용선과 대선으로 국내 해운계 랭킹 5위의 대형국적선사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진방 회장은 해운 단체장을 맡는 등 외부 활동에 전념하면서 대학 후배인 전문 경영인 사장에게 경영을 일임하다 결국 시황 하락의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도산하고 말았다. 창업자 이맹기 회장이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성장시킨 대형 국적선사가 2세 경영인의 미숙함으로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같은 2세 경영인들의 미숙한 경영으로 도산한 국적선사들이 대한해운 외에도 동남아해운(동서해운) 등이 존재했었다. 또 경영 분쟁으로 도산한 업계 랭킹 2위 범양전용선도 해운사적 가치가 있는 국적 대형 해운사였다.
이 밖에도 1967년 2월에 설립된 바 있던 국제해운도 한 때 한일 및 동남아항로 강자였다. 또 50년대에 창업되어 국적선사로 해운합리화에 의해 사라진 신한해운도 의미있는 족적을 남긴 해운사였다. 1955년 6월에 현영원 회장에 의해 설립된 이 회사는 현 회장의 사위였던 정몽헌 회장의 현대상선으로 합병되었다.
현 회장은 이 회사의 회장직을 맡기로 했다. 그러다 정 사장이 타계한 후 부인인 현정은 회장이 경영을 맡아 해운계는 물론이고 재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범양전용선의 ‘SILVER PARK’호